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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08. 2019

회사는 학교가 아니었다

기면증 진단을 예약하다

열 시간도 넘게 자고 일어난 날 졸음운전으로 자유로에서 큰 사고를 냈던 취업준비생은 기면증 진단을 뒤로 미뤘다. 질병 없이 건강하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면접에서 강한 체력으로 어필해 입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리고 사회는 달랐다. 졸음이 쏟아지는 회의시간에 고등학교 때처럼 벌떡 일어나 서 있을 수 없었다. 임원진 앞에서 조는 나의 무릎을 찔러 깨워줄 동기도 없었다. 대신 내 옆자리엔 과장님과 차장님이 바른 자세로 앉아 고객이나 상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언제 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봤을 때 분명 눈을 뜨고 집중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들어간 날인데도 클라이언트 임원진과 미팅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조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조는 시간은 길지 않겠지만 몇 십억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려는 데 담당 회사 말단이 몇 초라도 졸음에 빠진다면 향후 고객사와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해서다.


요즘 빌딩 대부분이 그렇듯이 창문 없는 환기 시스템만으로 내부 온도를 조절하는 사무실은 공기는 유독 답답했다. 높은 건물 중간층에서 자주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애매했다. 마감기한이나 중요한 회의, 미팅이 없는 오후 시간 가끔 하릴없이 한가한 때가 있었다. 그런 때 파티션 사이 내 자리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느라 목 뒤가 아파서 깬 적이 한두 번 있었다. 평소 졸음이 급작스럽게 내 눈꺼풀을 잡아당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내가 알 정도면 근무시간에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은 적이 꽤나 여러 번 있다는 의미다. 돌아보니 고등학교 수업시간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 수업을 들은 줄 알았는데,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내가 엄청 졸았었다고 말해줘야 알았었다. 어느 날은 사수였던 과장님이 "요새 많이 피곤한가 봐?"라면서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내가 또 잠이 들었나 해서 긴장했는데 다행히 과장님도 바람 쐬러 가는 길에 내가 눈에 띈 것뿐이란다. 하지만 많이 피곤하냐고 물은 것은 분명 내가 깜빡 수면상태로 빠진 것을 사수가 한두 번 본 것이리라.


회사생활은 회의의 연속이었다. 앞에 컴퓨터가 있어 계속 눈과 손가락을 움직이면 좀 덜 졸렸는데, 회의시간은 회의록을 적기 위해 잠시 움직일 때 말고는 상사나 고객의 말에 집중해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나는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앞자리에 앉지 않고 배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의가 두 시간 이상 길어질 때는 졸음이 밀려와 위기의 순간이 종종 있었다. 부서의 누구도 나에게 고등학교 친구들처럼 "왜 그렇게 병든 닭처럼 졸아?ㅋㅋㅋ"라며 장난을 치거나 짚어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의 무서운 점은 직접 말하는 것보다 당사자가 모르는 조치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혼을 내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소문이 돌고 인사고과에 기록도 없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다. 내 인사평가를 작성하는 선배 또는 내가 속한 부서의 관리자의 머릿속에 잘 조는 신입사원으로 각인되면 조용히 주요 업무에서 배재될 것이니 말이다.


회의실에서 조는 신입사원, 자리에 앉아서 자주 조는 모습을 보이는 신입사원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다.


수많은 회의와 미팅들을 하면서 나는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넘겼다. 나는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데 고객이나 상사 앞에서 갑자기 고개를 떨궈 무례하고 무능력한 신입사원이 될까 봐 마음 졸였다. 내 우려와는 반대로 내가 실적 우수 사원으로 연말 3주 동안 해외 출장팀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말을 부서장에게 들었다. 사무실에 앉아 꾸벅거리는 내 모습이 운 좋게도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는 사원처럼 비쳤나 보다. 하지만 이건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용인되는 상황이었을게다. 회사에 들어온 지 몇 년째 계속 제자리에서, 회의 때 자주 꾸벅거린다면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는 정말 기면증 진단을 받으러 갈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를 하고 비용 문제도 해결됐으니 말이다. 아무리 후에 보험처리가 된다고 해도 취업준비생은 100만 원 가까운 검사비와 진단비 그리고 약값을 부담할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비용이 부담된다는 핑계로 진단을 미룰 수 없다. 다섯 번째 월급을 받고 나서야 기면증 전문 병원에 상담 예약을 하기로 결심했다.


병원에 전화해 인터넷 게시판에서 수도 없이 읽은 '수면다원검사'에 대해 문의했더니 먼저 원장님의 진료를 받고 설명을 들으며 일정을 잡으면 된다고 했다.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보험 혜택과 부모님께서 들어주신 보험의 종류와 보장 범위 등을 보험 아주머니에게 전화해 자세히 질문했다.



드디어 기면증 전문 개인 병원에서 진단을 받기 위해 첫 검진을 예약했다. 기면증 치료 병원 문을 두드리는 데 3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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