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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09. 2019

이러다 우주선 타러 갈 것 같아

여러 가지 장비들과 수십 개의 센서에 온몸을 맡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수면장애 전문 병원의 자동문으로 들어서니 주말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접수를 하고 문진표를 작성했다. 질문 항목이 많아 다섯 장이 넘어갔다. 작성을 마치고 병원 테이블 위에 놓인 기면증에 관한 책을 괜히 집어서 뒤적뒤적 훑어봤다. 치료와 수면다원검사 안내문을 프린트해 모아놓은 A4 클리어 파일도 읽었다.


잠시 후 안내데스크 직원이 원장 진료실 바로 앞 복도의 의자로 데려갔다. 앞에 앉아서 하얀 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흰색 방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나왔다. 긴장을 풀어 보려 깊은 호흡을 몇 번 마시고 내쉬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며니씨 들어오세요."


블로그 글과 홈페이지에서 몇 번이나 본 원장님이 앉아있었다. 하얀 방 안 허리춤 높이 책꽂이가 벽면마다 있어 각종 책이 많이 꽂혀있었다. 오른쪽 벽면엔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쓴 문진표를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 "아주 크게 웃을 때 갑자기 몸의 근육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졸음이 오는 현상이 시작된 게 언제쯤인 것 같아요?"


- “기면증 증상이 운전 중 나타났다고 체크했는데 상황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해주겠어요?”

- "혹시 밤에 잘 때 코골이가 심하다거나 몽유병 증상을 보인적이 있다는 말을 가족에게 들은 적 있습니까?"


등의 물음이었다. 평소 말이 없고 낯을 가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긴장한다. 이날은 30년 묵은 그간의 고민들이 술술 풀리며 짧은 질문에도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기면증 환자에게 꼭 필요한 질문만을 하겠지만 마치 내가 대답할 게 많은 것만 골라 묻는 것 같았다. 자유로에서 큰 사고를 낸 이야기, 중요한 회의에서 졸은 얘기 등 가까운 사람에게도 부끄러워 잘 못했던 이야기들을 줄줄 풀어놨다.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컴퓨터에 메모하며 들었고 "기며니씨만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환자도 비슷한 사례가 여럿이에요."라며 안심시켜줬다. 약 30분 정도 그간의 증상과 상태에 대해 의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크게 웃을 때나 긴장했을 때 갑자기 몸에서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다리에 힘이 약간 풀렸던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지만 서서 오른 다리를 살짝 옆으로 짚어 힘을 줘야 하는 정도였다.


"문진 결과 기면증 중증에서 조금 더 심한 정도인 것 같네요. 검사를 해봐야 확진을 할 수 있습니다. 검사 스케줄 잡으시고 비용이나 보험 혜택 등도 담당자에게 안내받으시면 됩니다."


원장님의 말을 들으며 여기서 치료받으면 내 증상이 개선될지, 약을 먹어야 하는 건지 등등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우선 검사를 먼저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문을 열고 나오니 진료실 바로 앞 의자에 나이가 지긋한 여성분이 앉아있었다. 대기실에는 내가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불면증, 코골이 등 여러 가지를 치료하는 병원이었지만 수면장애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상담 담당자와 함께 작은 상담실에 들어갔다.


잠잘 때 생리상태를 여러 각도에서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수면다원검사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검사를 추가해야 했다. 한 시간 자고 20분 깨고를 네다섯 번 반복하는 수면잠복기 반복 검사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병원의 검사실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여러 지수를 체크해 분석한다고 했다. 당시 검사 두 개의 비용은 1인실 기준 약 150만 원 정도였고 실손의료보험이 있으면 검사비를 보험료로 대체하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018년 7월부터 수면다원검사 비용을 급여화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음. 참고: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 진료 예약을 하며 보험 아줌마에게 미리 전화해 받을 수 있는 보험혜택 금액과 필요 서류 등을 알아갔다.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수면실이 5개인데, 주말마다 예약이 꽉 차있다고 했다. 나는 진료받은 날부터 3주 뒤 주말에 1박 2일의 검사 예약을 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치료 방법이 정해진다고 했다.



큰 결심을 하고 주말에 기면증 병원에 다녀온 후 다시 월요일이 왔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며 시도 때도 없는 졸음의 공격을 받을 때면 빨리 검사와 치료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예전에는 그냥 졸린가 보다 했었는데, 진찰을 받고 검사 예약을 했더니 낮에 졸음이 오는 순간 촉각이 곤두섰다. 8시간 이상 충분히 자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또 스르륵 잠이 왔다. 평소 같으면 나는 잠만보니까 하고 졸다 깼겠지만 이제는 왜 잠이 또 오는 것인지 짜증이 났다. 치료의지가 생기면서 내 몸의 상태에 예민해져 불편을 느꼈다.



3주 뒤, 저녁 5시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며칠 전부터는 과도한 음주를 하거나 밤을 꼴딱 새우는 등의 무리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었다. 평소처럼 출퇴근을 반복하고 늦잠을 자고 일어난 토요일이었다. 진찰을 받은 병원 위층에 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들과 작은 샤워실이 있었다. 고급 모텔 같은 분위기의 방에서 환자복을 입고 잠을 자며 검사를 받아야 한단다. 방에는 싱글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침대에 베개 세 개와 이불이 있었다. 침대 옆에 간이 테이블 한 개가 있는 아담한 방이었다. 1박 2일 동안 생체 기록을 당할 공간에서 키와 몸무게를 재고 알레르기 유무, 임신 여부, 복용 중인 약물 등을 기록하는 문진표를 작성했다.


우주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파스 재질의 살색 테이프로 얼굴 곳곳과 팔, 목 등에 센서들을 고정시켰다. 센서를 두피에 닿게 하고 전선이 떨어지지 않게 머리카락에 하얀 석고 반죽을 발라 고정시켰다. 양쪽 콧구멍에는 호흡 상태를 측정하기 위한 가는 호스를 꼈다. 방 안에는 코골이 소음을 측정하기 위한 마이크와 내 상태를 관찰하는 카메라도 설치했다는 안내를 받았다.


MBC <나 혼자 산다> 출연자 박나래 씨가 수면다원검사를 받았다. 이렇게 얼굴에 몇 개의 센서를 붙이고 잠을 자야 한다. 처음에는 어색한데 이내 적응하고 졸음이 온다.


집과는 다른 환경에서 실시간 카메라로 관찰당하고 내 모습이 녹화까지 되는 데다가 수십 가닥의 전선과 몸을 연결했더니 긴장됐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심장이 약간 두근거렸다. 검사 결과는 어떨까 두렵기도 했다. 낯선 환경에서 두리번거리다 괜히 회색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어색함도 잠시. 가져온 책을 펼쳐 들고 편안히 베개에 기대앉아 가려운 허벅지를 벅벅 긁었다. 손가락과 종아리, 뒤통수까지 전선으로 장비와 연결된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면서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셀카도 찍었다. 검사가 치료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잊고 공상과학 영화 속 우주로 가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전선을 가득 붙인 뒷모습은 이렇다

약 25개가량의 센서를 부착하는 이유는 뇌파를 측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센서는 호흡에 따른 산소포화도, 혈압, 심박, 뇌파, 안구와 근육의 움직임 등을 통해 수면 단계가 깊어지는 시간을 측정하고 뇌가 깨어나는데 얼마 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그리고 자면서 몸을 어느 정도로 뒤척이는지 등을 체크한다.

온몸에 부착한 센서들이 정확하게 기록한 수치를 1박 2일간 모아 패턴을 분석한다.



처음 몇 시간은 자면 안 된다. 일상 활동할 때의 뇌파를 측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책을 읽고 괜히 손가락과 발가락을 죔죔 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깨어있어야 하는 시간에는 잠이 들려고 하면 삐-하며 기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참, 나라는 사람은 온몸에 센서를 달고 카메라와 마이크까지 있는 낯선 곳에서도 편안히 잠이 잘 오는구나.' 졸음을 쫓으며 두 시간가량 깨 있다 보면 검사원이 와서 이제 자도 된다고 한다. 다만 그냥 자는 게 아니라 세 시간 동안은 매시간마다 깨운다. 45분 자고 15분 깨어있고 다시 잠들었다 잠시 깨어있는 식이다. 검사자에게 이 설명을 들었을 때 저게 가능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괜한 걱정이었다. 자다 깼다가 다시 잘 때도 바로 잠으로 빠져들었다.


마취할 때와 비슷했다. "10부터 거꾸로 세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10, 9... 하자마자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면 수술이 끝나 있듯 나는 정신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깨워서 일어나면 몽롱한 상태에서 검사원이 꿈을 꾸었는지,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나는 대로 횡설수설 말했고 검사원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깨어있어야 하는 시간에는 누우면 안 되고 앉아있거나 서있어야 했다. 일어났다 자다를 몇 번 반복하고 아침이 됐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서 아침이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침 이른 시간에도 검사원이 한두 번 깨웠다 다시 잠들었다. 몇 번이나 검사원이 깨워 자다 깨다 했지만 나는 으레 그렇듯 매일 아침과 같은 컨디션이었다. 일어났다가도 눕자마자 잠에 빠져서 그런지 검사 후 유달리 더 피곤한 느낌은 없었다.


30년간 기면증 증상을 무시하다 긴 고민 끝에 어렵게 검사를 받았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증상이 나타났을 때 바로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치료받을 수 없었다. 난 기면증이 아니고 조금 잘 조는 사람일 뿐이라고,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운 좋게도 신체에 큰 질환이 없는 삶을 살았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내 선택이 아닌 질병으로 인해 삶에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 생긴 수많은 이들이 겪은 아픔의 시간이 새삼 안쓰러웠다.


내가 만약 기면증 진단을 고등학교 때 받았다면? 입사 지원서와 대외활동 프로그램 등의 지원서 질명 유/무란에 늘 기면증을 쓰고 복용하는 약을 기입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질병에 따른 차별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 신경 써서 보살펴야 할 점이 더 많은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졌으리라. 확진을 받았다면 운전도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는 군생활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질환에 따라 활동 범위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었나 보다.


수십 개의 센서를 붙이고 침대에 누웠을 때 우주인들이 훈련을 받으며 각종 장비를 몸에 착용하고 바이탈 지수를 체크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이 우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도 우주 안에 있는 우주인 것이다.' 나는 지구별 여행을 하고 있는 우주 여행자다...라는 생각을 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우주인들이 거대한 로켓에 몸을 싣고 지구별 너머의 다른 행성으로 가듯 검사실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차원으로 가는 발사체 같았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수면실 옆 1인용 작은 샤워실에서 머리에 전선을 고정하느라 붙인 하얀 석고를 떼냈다. 검사 결과와 함께 앞으로의 치료방향을 안내받을 진찰 예약은 6일 뒤 주말에 했다. 환자복에서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고 퇴원했다. 병원 건물을 나서 지하철로 향하는데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결과에 따라 앞으로 매일 약을 먹어야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됐지만 이제 더 이상 졸음 앞에서 무기력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괜스레 콧노래가 나오는 일요일 오전 열 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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