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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07. 2019

하자판정은 취업하고 받을래

질병 유무(있을 경우 구체적으로 기입하시오.):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후 내가 자유로의 살인무기가 된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간 이해할 수 없던 증상들을 검색을 하던 중 내 이야기인가 싶은 사례로 시작하는 칼럼을 읽었다.


직장인 최 모(29)씨는 최근 불면증 때문에 수면 클리닉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는 질환인 ‘기면증’ 진단을 받은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수시로 밀려드는 졸음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많았지만, 늘 자신이 의지가 부족한 거라고만 생각해 왔다. 기면증은 생각보다 흔한 질환이다...

[출처] 시도 때도 없는 ‘폭풍 졸음’, 혹시 기면증?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KISTI)


글을 다 읽으니 '나 기면증 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나는 기면증일 리 없다는 자기부정을 멈추고 제발 진단을 받자는 마음의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기면증을 치료하는 전문 의원들도 여러 개가 있었다. 개인병원의 홈페이지와 홍보용 블로그 포스팅을 샅샅이 뒤져서 읽었다. 기면증 환우 온라인 카페의 글과 후기들도 봤다. 기면증 치료의 시작은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수면다원검사를 하는 것이다. 안내문을 참고하니 병원 검사실에서 1박 2일 동안 깨어있을 때와 잠이 들 때, 잠들었을 때의 뇌파 등 신체 반응을 기록하고 검사한다. 하지만 선뜻 병원을 찾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검사 비용이 100만 원이라고? 나는 학생이고 취업 준비생이라 돈이 얼마 없는데...



사실 돈이 없는 것보다는 진료기록이 취업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 컸다. 보험처리가 된다는 등의 검사비와 치료비 절감 관련 안내문이 있었으나 무시했으니 말이다. 전화 문의한다고 진료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닌데 ‘취업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지?’하는 생각만 점점 커져서 선뜻 병원에 전화하기도 꺼려졌다.


인명 사고를 낼 뻔 한 충격도 잠시. 나는 또다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예전으로 돌아갔다. 지난 30년 가까이 그랬듯이 건강은 입시와 취업에 밀려 뒷전이 됐다. '취업하고 병원 가면 되지. 그리고 나 정도면 심각한 기면증은 아닐 거야.' 다시 스스로와 타협했다.


처음에는 기면증은 아주 심각한 병이라서 내가 걸렸을 리 없다고 부정했고, 전문가의 글을 읽고 앱워스 졸음 척도를 통해 자가진단을 통해 기면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회의 때 임원진 코 앞에 앉아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숙면을 취했는데도 졸음이 쏟아질 때는 생각대로 내 몸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인데. 도움과 치료가 꼭 필요함을 자각했지만 다시 취업에 몰두했다. '취업하고 천천히 가도 늦지 않을 거야.'를 주문처럼 외웠다.


취업 준비에 몰두하면서도 머릿속에는 ‘혹시 내가 정말 기면증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따라다녔다. 운전대를 잡지 않는 정도가 취준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늘 졸리고 가끔씩 다리에 힘이 빠진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별 거 아닐 거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취업이라는 생각만 했다.


기면증으로 병원을 찾아가지 않아 입사 지원서를 쓸 때 <지병/질병 유무> 란에 당당히 '없음'으로 기재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기업 공채에서 지병과 병력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이, 학점, 토익점수 기업에 따라서는 키와 몸무게, 인턴과 대외활동 개수, 경력 수 등 여러 가지 숫자들을 입력하고 마지막쯤 장애유무, 보훈대상자 여부 그리고 질병 여부를 기록하는 칸이 있다. 질병 유무(있을 경우 상세히 기입하시오.) 칸을 빈칸으로 지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당시 개인 병원에서 기면증 진료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취업 전형의 신상정보 조회 등에서 진료기록이 검색되는지 안 되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기면증 치료 여부가 취업에 영향을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보고 문의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큰 병치레 없이 자랐기 때문에 토익점수와 학점으로 합격자와 탈락자가 나뉘는 치열한 구직 현장에서 낙오자가 될까 봐 겁이 났다.


자기소개서를 들고 입사한 선배들을 찾아다니고, 정신없이 면접 준비를 하고 여러 단계의 면접을 거쳤다. 자기소개서부터 나는 질병이 없었고 면접 때 역시 평소에 등산을 가고 걷기를 좋아한다며 나의 튼튼한 체력을 어필했다. 면접장에서는 내가 기면증인 것 같다는 의심은 해 본 적 없는 것처럼 당당했고, 자유로에서 졸음 때문에 사고 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건강과 꾸준함을 나만의 특장점으로 어필하며 수면장애의 좋은 면만 뽑아서 썼다. '어디든 머리만 대면 깊은 잠을 자는 사람.'으로 내 기면증 증상의 극히 일부만 편집해버렸다. 어디서나 잘 자는 나는 적응력이 좋고 건강한 사람임을 뜻하니까.



지원한 여러 기업 중 한 곳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몇 달간의 노력 끝에 입사를 했고, 합격하자마자 기면증 진단을 받으러 가리라는 나와의 약속은 자연스럽게 잊었다. 입사의 기쁨에 부푼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기에도 시간은 부족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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