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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06. 2019

설마 내가?

끝까지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대기업 임원진 코 앞에서 졸고, 자유로에서 달리며 부드럽게 옆 차선으로 넘어가 달리는 트럭을 밀어내는 큰 교통사고를 낸 후. 병에 걸린 것 같고 도움이 절실하다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내 몸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졸음과 수면에 관한 여러 가지를 검색해 정보들을 쉴 새 없이 읽었다.

<졸음병>을 검색하니 '기면증'이라는 단어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전까지는 기면증이라는 단어가 검색 결과물에 나와도 그냥 스크롤을 내려버렸다.


'뭐야, 기면증? 무슨 기면증까지 나오냐...'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제대로 들을 기회조차 없는 단어이기도 했거니와,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면증을 가진 사람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심각한 증상을 보였으니 말이다.


영화 <4인용 식탁>에서 전지현은 기면증에 걸린 여자다.

커다란 구내식당에 사람들이 식판을 들고 줄지어 밥을 배식받고 있는 장면. 갑자기 한 여자가 스위치 꺼진 로봇처럼 몸에 힘이 빠져 뒤로 넘어가 쿵 하고 쓰러지며 바닥에 떨어트린 식판의 음식물에 드러눕는다. 놀란 주변 사람들이 달려와 깨워보지만 여주인공은 음식물을 베개 삼아 고이 잠들었다.


공포영화 <4인용 식탁>의 주인공 전지현은 기면증 환자다. 길을 가다 매가리 없이 쓰러지고, 박신양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다 별안간 스르르 눈을 감고 상체가 흘러내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에 빠진다. 학창 시절 이 영화를 보며 지구 어딘가 외계인이 있다는 것처럼 '기면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이 어디엔가 존재하겠구나.'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래, 급식실에서 식판 들고 잠에 빠져 밥과 반찬 위에 누워버리는 전지현 정도는 돼야 기면증 아니겠는가! '나는 잠에서 잘 못 깨고 자주 조는 정도지 심각하지는 않네.'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면증에 대한 정보는 자동으로 거르고 <기가 허약한 체질 개선하는 한약> 등의 정보들을 읽어댔었다. 하지만 내 증상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잘 조는 사람>, <나도 모르게 정신을 깜빡 잃었어요>, <졸음운전 사고>, <많이 잤는데 조는 사람> 등을 검색해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잠을 충분히 잤고, 긴장한 상태에서도 눈이 감기는 내가 병에 걸린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결국 마지막 검색어였던 <졸음병>을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온 기면증의 결과들을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졸음을 갑자기 졸음을 참을 수 없는 것을 수면발작증세라고...

- 뇌의 신경 전달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 嗜 즐기다 기, 眠 잘 면, 症 증세 증. '잠을 좋아하는 증상'이 기면증의 사전적 의미지만 환자가 잠을 좋아해서 생기는 증상이 아님...

- 미국 역학 조사에 따르면 인구 2000명 중 1명이 기면증 환자..

- 기면증(Narcolepsy, 嗜眠症)은 일상생활 중 발작적으로 졸음에 빠져드는 신경계 질환이자 수면장애이다. 최근 원인이 일부 밝혀져서 기면병(嗜眠病)이라고도...


기면증 전문 의사들의 글과 학술지, 공인된 정보들이 보였다. 전문 자료들을 읽으며 기면증이 호르몬과 신경계 질환이라는 정의를 처음 알 수 있었다. 자가 테스트로 병원을 가야 하는 정도인지 스스로 가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수면 학술지 <슬립(SLEEP)>에 1999년 게재된 주간졸음증 자가진단표인 ‘엡워스 주간졸음 자가평가척도(Epworth sleepiness scale)’가 있었다. 나에게는 생소했지만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깊이 있는 연구들과 자료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전지구에서 사용하는 자가진단표의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 각 항목의 결과를 '전혀 없음'인 0점부터 '매우 많이'인 3점까지 합산하면 된다.


<앱워스 졸음 척도> 출처: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설문지


자가 검사지 안내문에는 '총점수가 8~10점 이상이면 기면증을 의심해야 한다.'라고 했다. 내 점수는 20점이 넘어갔다. 다 그런 거 아닌가 해서 동생과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4~6점 사이가 나왔다. 소름이 목을 타고 올라가 두피 모공이 저릿했다. ‘나 생각보다 심각했구나.’ 자가진단 결과에 따르면 나는 기면증이 확실했다.


그제야 국내에 어떤 병원이 있고 진단은 어떻게 하는지, 환자 후기들을 기면증 카페 등에 가입해서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병에 걸렸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6명 중 1명은 앓는다는 우울증처럼 사회에서 공유되는 정보가 많은 질환이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기면증에 대해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는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는 국내 약 3만 명 정도가 기면증을 앓고 있으며 매년 600명씩 늘고 있다고 한다. 희귀 질환에 속하는 병이라 나와 주변인들에게 무지의 영역이었던 기면증이 나를 잠식해 교통사고를 내고도 '나는 병이 걸린 게 아니야.'라며 조금 잘 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면증이라는 것을 아는 데 거의 30년이 필요했다. 겨우 의사의 진료를 받기로 결심한 일이 드디어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 힘겹게 뗀 첫걸음이었다. 정말 내가 우리나라 사람의 0.05%가 걸리는 희귀병에 걸린 걸까? 정확한 답을 들으려면 어떤 병원을 가야 하나 계속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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