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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10. 2019

하루 24시간 자는 사람

나의 뇌는 깨어나지 못했다

아주 심각한 기면증입니다. 기며니씨는 갑자기 잠에 빠지는 게 아니고 24시간 아예 깨지도 못하는 상태군요.

검사 결과를 보고 담당 의사는 내가 중증 기면증 환자라고 확진했다. 일상생활을 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환자별로 정도에 따라 증상이 다르겠지만 내 뇌는 거의 24시간 잠을 잔단다. 남들에게 꿈나라 모드와 활동 모드가 있다면, 나는 꿈나라 모드 한 개뿐이라 수면과 비수면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의사는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와 자는 동안 뇌파와 안구를 비롯한 온몸의 움직임 등을 30초 단위로 잘라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라고 했다.


평소에 졸음이 많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1박 2일에 걸쳐 150만 원들여 받은 검사(수면다원검사와 수면잠복기 반복 검사 참조) 결과 나는 중환자였다. 진단비야 실손의료비 보험으로 70% 이상 돌려받겠지만 과연 내가 나아질 수 있을까, 대체 약은 얼마나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막막했다. "뇌하수체... 시상하부... 하이포크레틴... 중추신경계..."의사 선생님이 자세하게 내 몸에서 기면증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말했지만 당시에는 검사 결과지에 찍힌 숫자들이 정확히 선고한 심각한 내 상태에 충격을 받아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다큐멘터리와 책, 논문 등을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기면증 증상은 뇌의 호르몬과 이를 전달하는 통로에 이상이 생겨 나타난다. 보통은 졸릴 때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이는 커피가 요술을 부리는 게 아니고 화학물질과 호르몬들의 작용 때문이다. 커피의 카페인이 우리가 잠에 빠지도록 뇌에서 분비하는 아데노신 호르몬을 막아서 그렇다. 매일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들은 귀가 우리의 눈꺼풀을 영차하고 들어 올려 일어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침에 깨려면 오렉신, 하이포크레틴 등 신경전달물질이 뇌에서 나와야만 한다. 랜선을 타고 데이터가 이동해 제대로 인터넷 통신을 하듯 뇌에서 분비된 물질이 중추신경계를 타고 제대로 전달되면 우리는 잠에서 깨 일도 하고 밥도 먹게 된다. 우리가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은 모두 호르몬들이 광케이블을 타고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데이터처럼 신경계를 통해 뇌와 신체의 각 부분에 필요한 양만큼 제대로 닿은 결과다.


하이포크레틴의 분비와 작용을 설명하는 예쁜 그림. KBS1 <생로병사의 비밀> 맞다. 졸음도 병이다.


호르몬이 삶의 패턴에 맞춰 적절한 양이 제시간에 분비돼 우리가 문제없는 일상을 사는 것은 20년 가까이 지난한 훈련을 받은 덕분이다. 갓난아이가 낮밤 구분 없이 울어대는 걸 잠투정이라고 한다. 신생아의 부모님들은 아이의 잠투정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서 미칠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한다. 우리 모두는 어릴 때 수면과 비수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가 훈육을 받고 자는 시간과 깨있는 시간을 구분하게 된다. 유치원은 30분, 초등학교는 45분, 중고등학교는 50분 그리고 대학교는 1시간 반 정도 수업을 한다. 이렇게 각성상태에서 잠에 빠지지 않고 집중하는 시간을 점차 늘려가는 사회적 훈련을 받는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으로 수면습관을 몸에 배도록 만든 일반 성인은 하루 평균 16시간은 각성상태고 8시간은 수면을 취한다. 할 일이 많아 오랜 시간 깨어있어야 할 때는 카페인을 섭취해 잠이 오는 호르몬의 작용을 억제하면서 눈을 뜨고 일에 집중한다. 하루 최소 6시간 이상의 수면시간을 확보한 건강한 성인이라면 내가 깨어있고 싶을 때 깨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이 의지로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유는 모르지만 중학교쯤부터 내 뇌에서는 하이포크레틴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모르고 깨지 않는 나를 깨우느라 온 가족이 아침마다 한 시간씩 전쟁을 치렀고 성인이 돼서는 자유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호르몬 분비가 부족한 게 아닌데 이런 줄도 모르고 '나는 왜 남들보다 의지가 부족할까, 나는 왜 자도 자도 또 졸리는 나태한 사람인가'하며 자책했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줬으며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잘 조는 사람이라며 웃어넘긴 30년. 그 긴 세월 동안 뇌에 장애가 생겨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이 힘겹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사실이 별안간 나를 덮쳐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두 번밖에 안 본 의사 앞이라 벌게진 눈으로 황급히 울음을 꿀꺽 삼켰다.



내가 중증 기면증 환자 확진을 받은 이유는 호르몬 부족 외에 또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5단계에 걸쳐 아주 깊은 수면으로 빠져든다. 일반적으로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후에 렘수면 단계에서 빠르게 눈을 움직이며 꿈을 꾼다. REM은 급속 안구 운동(Rapid Eye Movement)의 줄임말이다. 옅은 잠에서 시작해 서서히 4단계를 거쳐 완전하고 깊은 수면상태에서 잠시 옅은 잠으로 올라와 꿈을 꾸는 단계가 렘수면(REM)인 것이다. 하지만 검사 결과를 보니 내 뇌는 늘 꿈나라에 있는 상태여서 눈을 감자마자 3분 만에 깊은 잠 없이 수면주기를 건너뛰고 순간 이동해 렘수면이 나타났다.


잠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출처: BBC KOREA


성인이 렘수면에 빠지려면 잠에 들고 평균 90분 정도가 걸린다. 중증 기면증 환자인 나는 몇 분이었을까? 검사 결과 평균 3~4분 사이였다. 항상 장난처럼 "저는 어딜 가나 눈만 감으면 뒤통수에 스위치가 꺼져서 곯아떨어진답니다."라고 했다. 장난칠 게 아니었다. 늘 수면상태인 나의 뇌는 눈을 감자마자 렘수면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수면 검사를 받으며 뇌파와 함께 안구 옆에 붙인 센서로 내가 3분 만에 렘수면에 빠진 것을 측정했다. 누군가 깊게 잠을 잘 때 감긴 눈 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눈알의 움직임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렘수면 단계에서 꿈을 꾸고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뇌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신체의 근육만 힘이 빠져 움직이지 않아서다.

수면 단계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습. 우리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졌다 꿈을 꾸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90분 주기로 반복한다. 출처: 다음카페-루시드드림


'바로 깊은 잠을 자면 건강에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기면증의 렘수면은 그렇지 않다. 아기들은 잠을 자는 시간의 60% 이상이 꿈을 꾸는 렘수면이고, 성인은 20%대라고 한다. 신생아는 하루의 16~18시간을 자기 때문에 계속해서 렘수면이 나타나도 괜찮다. 하지만 성인은 하루 평균 6~8시간 밖에 잠을 못 잔다. 꿈을 꾸는 렘수면 때 우리의 정신이 회복되고, 렘수면이 아닌 깊은 잠을 잘 때 신체가 충전된다고 한다. 우리 몸은 참 신비롭다. 부모님에게 안겨 세상의 모든 단어와 감촉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가 때는 몸보다는 머릿속이 회복되야한다. 반면 하루의 3분의 2를 움직이며 일하는 성인은 팔다리 등 신체의 회복이 필요하다. 때문에 렘수면 시간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짧아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기면증 환자의 렘수면은 수면장애가 없는 사람이 4단계에 걸쳐 서서히 깊은 잠의 단계로 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잠에 들자마자 바로 나타나서 문제를 일으킨다. 누워서 잘 때도 깊은 잠으로 빠지지 못해 몸이 회복하지 못하고 각성상태와 비슷하게 뇌가 움직이는 상태라는 뜻이다. 신기하게도 기면증 환자는 늘 꿈나라인데 실제 수면의 질은 최악이라는 뜻이다. 이것도 자도 자도 졸린 이유에 추가다. 눈 뜨고 깨 있을 때는 자는 것 같고 자야 될 때는 활동할 때와 같다니. 호르몬과 신경계가 고장 나면 마음대로 자지도 깨지도 못한다.


문제는 또 있었다. 각성 호르몬 하이포크레틴이 부족해 수면과 비수면의 경계선 없이 늘 잠만 자는 나의 뇌, 눈을 감자마자 렘수면으로 빠져 신체의 근육과 대사가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의 몸. 여기에 한 가지 더. 수면검사실에서 녹화된 내 자는 모습은 무서웠다. 눈을 감자마자 크르렁 사자가 우는 소리를 내며 코를 골았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코를 고는 것 자체는 혼자 잔다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코골이도 다 같지 않고 소리가 나는 원인에 따라 위험도가 다르다. 내가 잠을 자며 사자 소리를 내는 이유는 혀가 기도를 막아서고 이는 몸에 산소가 제대로 전달되는 것을 방해한다고 했다. 각성 호르몬 부족, 눈 감고 3분 만에 렘수면으로 빠짐 그리고 코골이에 의한 산소부족 이렇게 쓰리 콤보가 나를 중증 기면증 환자로 만들었다.


초점 없는 눈에 사지 근육도 힘이 없어 늘어지고 뒤틀린 팔다리를 덜렁거리며 턱근육이 고장 난 듯 하관을 벌리고 "에에에"소리를 뱉으며 거리를 배회하는 좀비. 내 몸이 딱 이랬는데 치료받을 생각은 안 하고 무리하다 고장 났다. 잠이 많아 게으른 나는 의지 부족이라고 생각하며 몇 배로 노력해 삶의 목표만 성취했다. 건강보다는 입시와 취업이 제일이었던 시간. 그사이 내 기면증 증상은 더 악화됐다. 좀비는 뇌가 죽고 신체와 식욕만 남은 상태의 공포스러운 존재다. 눈은 떴지만 자고 있던 나는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됐다. 담당의는 나에게 '이렇게 증상이 심했는데 어떻게 일상생활을 했느냐.'는 위로 섞인 걱정을 하며 바로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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