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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16. 2019

당신이 힘겹게 건넨 별을 이제야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오래된 아픔이 난데없이 찾아올 때가 있다.


엄마와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서서 곧 잊힐 일들을 말하며 도란도란 입을 움직이면서. 수세미로 휘적거리며 밥그릇에 붙은 고춧가루를 보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봤다. 시선 높이의 창이 싱크대 위에서 네모나게 바깥세상을 부엌으로 들인다. 어둠이 내려 까만 하늘을 담은 창문은 검은빛 거울이 된다. 창밖의 네온사인만 흐릿하게 번져있고 창 속엔 내 등 뒤로 켜진 식탁의 전구와 엄마의 움직임이 뿌옇게 비쳤다. 그래서 해가지고 설거지를 하면 식탁에서 냉장고로 분주히 반찬통을 옮기는 엄마를 뒤통수로 볼 수 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동그란 물줄기로 그릇에 묻힌 세제를 씻어 보낸다. 끊김 없이 얘기하며 웃다 문득 오늘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사진처럼 지나갔다. 엄마의 관심에 별안간 짜증을 부리다 말다툼을 하며 모진 말을 뱉었다. 딸이 할퀸 마음에 좁쌀만한 피가 몽글거리며 올라왔을 텐데. 엄마는 그저 목도리를 동여매고 현관문을 나서며 뒷모습으로 "다녀올게. 밥 잘 챙겨 먹고."란다. 나는 시선을 티브이에서 떼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 끝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 듣고, 다 보면서도 엄마의 인사에 대꾸도 안 하고 입만 댓발 내밀고 있었다.


'만약 곁눈에 비치던 엄마의 뒷모습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면?' 엄마와 수다 떨며 설거지하다 문득 스쳐간 아침의 한 조각이 남긴 이 질문은 오래전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불러온 것이다. 한 아이의 심정이 밀물처럼 내 감정을 채웠다. 그가 고등학생이었던 십몇 년 전, 아파 누워있던 엄마가 "세탁해놓은 여름 교복 셔츠로 갈아입고 가라."라고 했단다. 가방까지 다 메고 나가려던 그는 “냄새는 엄마가 난다”고 하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분노와 경멸을 누워있는 엄마에게 퍼붓고 집 문을 닫아버렸다. 늘 그렇듯 화로 가득 차서 학교에 갔는데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매일같이 그날로 돌아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병색에 여위고 스러진 엄마가 떨리는 손으로 빨고 다렸을 하복으로 수백만 번 갈아입었으리라.


고무장갑을 낀 손등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약하게 줄였다. 등 뒤로 넘어오는 엄마의 별 거 아닌 일상을 말하는 목소리가 따뜻해서 물소리가 거슬렸다. 세제를 칠한 접시를 물아래 놓고 창문 너머로 비친 지금을 바라봤다. 부엌으로 흩어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새삼 소중했다. 준비 없이 엄마를 잃은 친구의 말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공간을 울렸고 안타까움에 눈물이 흘렀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몇 년이나 지난 오늘에서야 더 진득한 눈물이 그의 여름 교복 위에 떨어졌다. 엄마의 관심에 화로 답했고 현관문이 닫혔다는 물리적 공통점이 생기고 나서야 그가 겪은 아픔 중 아주 미세한 조각을 체험한 것이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은 당사자만이 안다. 상실은 수억 겹을 곱씹어야 말이 되는 법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처 입은 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만큼은 그에게 집중해주는 일뿐일 테다. 그가 아픔에 헌 마음을 헤집어 힘겹게 꺼내 전해준 슬픔의 별이 뜬금없이 나의 현실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온다. 당신의 눈물로 빚은 별엔 숙연한 축복이 담겨있었다. 그 빛이 선물 받고 수년이 지난 언젠가 어두운 나의 일상에 닿는 것을 보니 당시에는 감히 받을 수 없을 만큼 밝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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