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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Feb 22. 2019

나의 영혼을 두 팔 벌려 안아주세요

영화 <세라핀> (프랑스,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 2008)

맨발로 풀숲을 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상상처럼 보송하고 청결한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발가락 사이로 흙과 자갈이 끼고 벌레라도 스칠까 한껏 예민해진 발바닥에 기분 나쁜 습기가 젖어붙는다.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비릿한 짠내가 나는 바다에 풍덩 몸을 담그고 나면 물에 젖은 옷이 문어 빨판마냥 들러붙어 온몸을 짓누른다. 팬티 속까지 까끌거리는 모래들이 기분 나쁜 춤을 추는 건 덤이다. 자연과 하나 되는 건 집어치우고 어서 깨끗하게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세라핀>은 맨발로 들판을 걷는 여주인공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 영화다. 조명과 연출을 최소화해 날것 그대로 그녀가 살던 시대와 가난의 냄새를 보여준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며칠을 감지 않아 얼굴에 가닥가닥 눌어붙은 기름진 그녀의 머리냄새가 내 코밑에서 나는 것 같을 정도다.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그 시대로 갈 수 있다. 밤은 정말 어두워서 촛불이 일렁이는 부근 외에 아무것도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다. 조명으로 밝히지 않고 어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나도 그 어둠 속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여럿이다.


세라핀이 밤의 개울에서 물이끼를 캐 초록색 물감을 만들 때, 2008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마치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던 시절처럼 묘한 옛날 질감의 화면에 조용한 시골의 일상을 담았다. 개울의 물소리와 옅은 달빛 그리고 희미한 그녀의 뒷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초반에는 이거 공포영화인가 하며 혼자 섬뜩했다.) 그리고 잔디밭에서 차를 마실 때도 낡고 녹슨 의자에 풀벌레와 벌 그리고 파리들이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내가 19세기 프랑스 시골집 잔디에 앉아있는 것처럼. 재단하거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연출이 몰입감을 더하는 영화였다.


세라핀은 맨발로 걸어 다니는 여자다. 19세기 프랑스, 땅에 끌리는 치마에 겹겹이 둘러 입은 복식이 평범한 것이던 시대다. 현대적인 배수로 시설이 없어 중산층들이 밤새 채워놓은 요강을 세라핀이 비우고, 그녀는 풀밭에 치마를 걷고 쭈그리고 앉아 졸졸 소리를 내며 오줌을 눈다. 어딜 가나 분뇨가 흐르고 냄새가 코를 찌르던 때였단 뜻이다. 그랬던 때에 그녀는 맨발로 일하고 걷는다. 누가 뭐래든 내 인생 마이웨이인 그녀의 눈동자는 허드레 일을 할 때도 늘 또렷하게 하늘과 닿아있다. 몸은 청소를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캔버스 위에서 다채로운 색깔에 젖어 춤을 추고 있어서다.


천사의 계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매일 그린다. 빵보다도 하얀 물감을 당연하게 사서 질문도 없이 그저 그리고 또 그린다. 알아주는 이 없고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남의 집 빨래와 청소를 해주며 먹고사는 세라핀은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 알바생이다. 중산층의 집 청소를 마치고, 빨랫감을 걷어가 개울에서 빨고 다림질을 해서 가져다주고, 푸줏간에서도 그릇을 닦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그녀지만 아마도 스스로는 주업은 화가요 부업으로 허드렛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녀에게는 모든 자연이 물감이고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맨발로 땅과 호흡하고 길에서 마주치는 나무에 손을 얹고 말을 한다. 그녀에겐 슬픔이 일상이고 친한 친구였다. 정육점에서 일을 할 때는 주인 몰래 돼지 피를 병에 담고, 성당에서는 기도하는 척 촛불을 태우는 기름을 훔치며 한밤중에 개울가에서 녹색 이끼를 건져 올린다. 일터 곳곳에서 길어 올린 그녀의 슬픔을 담아 나무절구에 섞어 물감을 만든다. 밥도 안 먹고 방세도 밀려가며 매일 그리는 그림은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혹평을 받는다. 물감 살 돈으로 차라리 먹을 것을 사 먹으라는 폭언도 그녀에게는 일상이다. 큰 선심을 쓰듯 그녀의 그림을 보자던 주인집 마님은 세라핀의 그림이 별 볼일 없다며 응접실 구석에 처박아놓는다.



아픈 마음은 나무와 풀벌레에게 털어놓고 그녀는 다시 밥을 굶더라도 생각 없이 그리고 또 그리는 일상을 산다. 이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딱 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그림을 그리라는 건 하늘의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연히 피카소를 발굴한 미술 평론가 빌헬름 우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머무는 집을 청소하게 된다. 집주인의 식탁 한편에 아무렇게나 놓인 세라핀의 그림을 알아본 우데는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우리가 왕왕 마주치는 청소부 아주머니 또는 어느 집의 가정부께서 홀로 옥탑방에서 매일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그 그림을 진중권 님, 박영택 님과 같은 유명 미술평론가가 보고 극찬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필연 같은 우연을 맞으려 그녀 삶의 모든 불행이 일어났다기엔 너무 가혹하지만 마법 같은 사실임은 분명하다. '아, 세라핀의 인생에도 봄이 오는 것인가. 안목이 뛰어난 평론가와 순수한 시골 여성 화가의 교감과 사랑이 꽃피려나...' 내심 기대했으나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왜 그런지는 영화를 보시길 바란다.



피카소를 발굴한 평론가의 극찬을 받았으니 ‘드디어 그녀가 화가로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려나!’ 하는 찰나. 아직 그녀의 그림이 설익어서였을까. 그녀가 멸시와 조롱을 받을 때도 목청껏 찬양하던 그녀의 신은 세계 1차 대전 발발로 독일 국적의 평론가 빌헬름 우데가 도망치듯 프랑스를 떠나게 만든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단 한 명이 한순간에 기약 없이 증발한 것이다. 운명은 또다시 그녀를 가난과 고립 속으로 던진다. 하지만 세라핀은 아주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허드렛일을 하고 물감을 만든다. 우데가 급히 떠나기 전 지폐 몇 장의 후원금을 건네려 하자 그녀는 돈은 필요 없다며 돌려주기까지 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 전역을 파괴할 때도 그녀는 계속해서 붓과 손으로 빈 종이들을 채워간다. 동네 사람들의 먹다 남은 고기로 끼니를 해결하며 영문 없이 그림만 그리길 몇 년이 지났을까. 전쟁이 끝나고 우데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피카소를 발굴한 천재 평론가였지만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압수당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세라핀 등 그가 후원하던 화가들과 연락도 끊겼다. 몸도 성치 않았던 가난한 세라핀이 전쟁통에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그는 세라핀을 찾는다.


그의 바람대로 그녀의 그림은 전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전쟁까지 지나가고 나서야 드디어 세라핀의 삶에 작은 행복이 찾아온다. 우데는 그녀에게 그림이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며 파리에서 큰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한다. 세라핀은 더 이상 청소와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수입이 생겼고 2m가 넘는 커다란 캔버스들을 후원받게 됐다.


흰색 외에 모든 색을 직접 만들어 쓰던 그녀였지만,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우데가 돌아와 그녀의 발전한 그림 실력을 보고 물감을 세트로 사준 후의 모습이다.


명령어를 입력받은 로봇처럼 천사의 계시로 그림을 그린다며 연인도, 친구도, 가족도 없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매일 그림에만 몰두한 세라핀의 삶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놀림도 나무와 풀벌레에게 말하면 괜찮아졌던 그녀였으니, 유명세나 성공은 생각도 없었을 거다. 실속 없는 그녀의 삶 속에서 그림은 잉태되고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왔다. 세라핀젊은 날에 찾아온 사랑도 그녀 방식대로 실속 없었다. 그녀에게 구애하던 장교와 약혼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장교가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문득 떠올리며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세라핀. 그녀 말처럼 예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꽃과 과일 - Fleurs et fruits vers 1920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렸던 세라핀의 수입이 늘어나며 그녀의 삶이 빠르게 변한다. 세라핀은 무릎이 굳어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힘든 노동을 하면서 매일 성실히 돈을 벌었다. 누군가 호의로 적선하는 돈을 거절하며 그저 '그리기'에만 열중하던 그녀였다. 다락방의 촛불처럼 스스로를 밝히던 그녀가 부와 유명세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며 삶이 마구 출렁인다. 좋은 차와 넓은 집을 꿈꾸며 본인도 통제할 수 없는 아이 같은 욕망이 그녀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꽃과 과일> 그림을 본 그녀의 오랜 동네 친구는 "그림이 무섭다."라고 했고,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던 수녀님은 "정말 천사의 계시로 그리는 그림이 맞니?"라고 되묻는다. 그 말에 세라핀은 "가끔 저도 제 그림을 보면 섬뜩해요."라고 천진하게 웃으며 답한다. 영화에서 <꽃과 과일>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줄 때, 다리가 수백 개 꿈틀거리는 지네를 봤을 때와 같은 신체 반응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그저 그리는 행위에만 집중하던 단순한 그녀의 삶이었는데, 세라핀의 내면이 욕심에 출렁이며 변화해 낳은 생물체를 그림 위에 아프게 토해냈기 때문일 거다.


예술가의 숙명은 광기일까.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이 돈줄을 얼렸고 그녀의 그림 역시 판로를 잃어버린다. 아이 같은 그녀는 그저 우데가 사치하는 자신을 미워해서 그림을 안 팔아준다고 생각하며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붓을 놓고 새하얀 신부 옷을 입고 거리를 헤매던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신고로 정신병원에 간다. 어쩌면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이 미쳐있는 걸로 보였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대공황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후원자 우데는 하얀 독방 침대에 묶여 엉엉 울기만 하는 그녀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계속해서 세라핀의 그림을 팔며 전시회를 열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의 재능과 살아 숨 쉬는 그림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시켜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우데의 진심은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보내준 하늘의 도움이었나 보다.


든든한 후원자와 경제적 안정도 그녀의 투명한 영혼엔 독이 된 걸까. 세라핀은 붓을 놓으며 말도 잃었다. 우데가 간간히 그녀의 그림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시설 좋은 병실에서 여생을 보낸다. 몸은 정신병원에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한 자연의 눈부신 천연색 위에서 춤을 췄을 거다. 세라핀이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10년쯤 후부터 그녀의 그림은 세속의 찬사를 받는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익을 챙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라핀은 '날개가 셋 달린 천사'라는 의미도 있다. 1864년, 노동자 아버지와 농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1살 때, 아버지는 6살 때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세라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수녀원의 허드렛일을 하며 자랐다. 손과 무릎의 관절을 고스란히 바쳐 만들어낸 물감들과 세상의 비웃음을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실어 보낸 세라핀의 삶이 담긴 그림을 보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홀로 충만했으나 보통사람의 눈에는 어리숙해 보이는 그녀의 작품과 삶은 오늘도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여러 감정을 일으킨다. 구정물과 돼지 핏물에 담은 손으로 신을 찬양하며 가장 아름다운 색을  빚어낸 세라핀.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그녀의 정신을 표현할 때 '미쳤다'는 단어뿐인 게 아쉽다. 소박함과 광기 사이를 오갔던 화가 세라핀 루이스의 삶에 잠시 들어가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 <세라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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