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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un 20. 2019

마음과 법의 간극: 아이의 자살과 청년의 자살 사이에서

브런치무비패스시사회.스포 X. <칠드런 액트> (2017 이언 매큐언)

영국의 법적 성년 나이 18세를 3개월 앞둔 소년 A. 그는 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혈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A는 스스로 혈액을 생성하지 못하는 상태라 수혈을 하지 않으면 4일 안에 호흡곤란 등으로 사망할 것이다. 종교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인 그의 부모는 소년의 결정에 따른다며 의료진의 수혈 치료를 거부한다. 영화는 신념과 종교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헌법이 '모든 개인은 양심과 종교의 자유가 있다'라고 선언했으니 말이다.


병원은 소년을 살리게 해달라고 법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 가정법원은 평소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판사 피오나 메이(엠마 톰슨)를 적임자로 택해 그녀에게 사건을 배정한다. 사회적 갈등이 큰 사건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확고한 논리를 세워 판결하는 그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판결은 없는 법. 법원 앞은 늘 "정의는 죽었다"며 그녀의 이름에 분노를 섞어 외치는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다. 그녀의 출퇴근은 늘 법원 뒷문 샛길을 통한다. 작은 쪽문을 열면서도 그녀는 양쪽을 살펴야 하며, 살아있는 법전으로 불리는 판사는 법원의 정문과 대로가 아닌 쪽 길에서 안전한 현실의 모순을 볼 수 있다.


'인격을 부여한 법전'으로 불리는 판사지만, 시위대를 피해 법원의 뒷문과 샛길로 출퇴근을 해야한다.


그는 자주, 특히 어린아이의 삶과 죽음을 법정에서 결정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두근거리는 동맥과 혈관이 등장한다. 샴쌍둥이 중 심장과 폐가 없는 한 명을 분리해 사망시켜야만 다른 한 아이가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부모 그리고 종교는 죽음을 결정할 권리는 신에게 있다며 수술을 거부한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가 붙은 신생아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는 판사. 하루에도 몇 개의 판결을 내려야 하고, 샴 상둥이 케이스처럼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은 특히나 결정을 내리려면 의견과 파장 그리고 이해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늘 가방 속에 두툼히 서류를 챙겨 와 집안에서도 분석하고 고민을 계속한다. 그렇게 개인적인 시간까지 연소시키며 고민해 그녀는 판결을 내린다.


그녀의 재판장 안팎에는 늘 기자들로 가득하다. 양측의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그녀의 판결은 곧 영국을 비롯한 인류사의 흐름을 가늠하는 지표가 돼서 그렇다. 그녀는 늘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세간의 관심을 받는 사건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군더더기 없는 판결을 하는 그녀지만 그녀 스스로를 돌 볼 시간은 없다. 늘 검은 원피스에 검은 재킷 차림에 검은 구두만을 신는 그녀다.


짐이 곧 국가인 영국 여왕과 닮은 판사와 삶을 함께하는 남편 잭(스탠리 투치)의 마음은 어떨까. 부부의 집마저도 [판사 메이의 집]이라는 명패가 새겨져 있다. 이 영화가 신선했던 이유는 공인의 사생활을 감각적으로 편집해 고정된 성역할에 익숙한 나의 편견을 깨 줬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이에게 "맛있는 저녁을 먹고 기분 풀자", "주말 부부 동반 테니스 모임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으며 관심을 좀 가져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내'여야 했다. 영화 속 메이 판사는 투정 부리는 남편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약속을 확인하는 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샴쌍둥이 판결, 수혈을 거부하는 아이의 판결 등 재판 일정을 줄줄이 읊는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판사에게 남편이 "나 마트에 좀 다녀올게"같은 일상적인  말투로 수류탄을 투척한다.


나 바람피울 것 같아

그제야 번쩍 메이 판사는 서류에서 눈을 들어 안경을 벗고 남편을 바라본다. 남매처럼 변해버려 마음과 몸의 대화 모두 없는 현재 부부 사이와 그들의 뜨거웠던 지난날을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남편 잭. 그에게 판사는 재차 묻는다. 바람피우는 상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재판 서류가 수북이 쌓인 그곳도 집이 아닌 법정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알아낸 메이는 그제야 그녀가 딸 나이 벌의 수학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에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분노조차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판사였던 것이다. 남편의 바람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만 화가 나는 그녀라서 사랑했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남편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간다.

"나 바람피울 것 같아" 한치의 거짓 없이 할 말 다 하는 남편. 폭탄선언을 하고는 나가버린다. 그런데도 밉지가 않다. 판사와 배우자 모두에게 공감하게 만든 연기와 연출의 힘일까.

살아있는 법전인 그녀의 판결을 위해 소리 없이 맞춰주기만 했던 주변인들 중 가장 큰 희생을 했던 남편이 '사람답게 사랑하며'살고 싶다고 선언한 것이다. 완벽히 통제되던 판사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역사적 판결을 내려야만 하는 그녀의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나눠지던 배우자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오랜 시간 재판 말고 다른 것은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조차 잊은 그녀.

 

동료 판사들도 다르지 않다. (본인에게만) 웃기는 농담이 하고 싶을 땐, 동료 판사의 손에 뜨거운 커피가 있든 말든 보이지 않는다. 반갑게 뛰어온 동료 판사는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그녀를 흔들어 붙잡고 꼭 해줄 웃긴 얘기가 있다며 썰렁한 농담을 1인극 마냥 읊고는 배꼽을 잡으며 판사실 복도가 떠나갈 듯이 혼자 웃는다. 뜨거운 커피가 쏟아져 손목이 젖은 그녀는 보이지 않는 거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집 나간 남편이 걸어온 전화벨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낚아채느라, 커피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밀쳐 음식물이 비서에게 모두 쏟아진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에 젖은 비서가 있는 줄도 모른다. 엉망이 되어버린 일상을 혼자 꾸역꾸역 삼키며 머릿속으로는 판결 생각을 해야 하는 판사라서 그렇다. 놀라운 집중력을 가진 아이 같은 판사들은 그렇게 비슷한 처지인 서로를 이해하고, 주변 사람의 무한한 배려를 받는다. 오랜 시간 비서도 투정 한마디 없이 그녀가 재판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처리한다.


솔직하고 당차게 바람을 피우겠다며 나간 남편 생각에 그녀는 법정에서 가시 돋친 칼을 휘두른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몇 초만에 논리로 제압하며 날 선 판결을 내리고 자료 보완 등을 명령한다. 쉴 틈 없이 진실의 검을 들이대는 그녀 앞에 벙찐 변호인, 피고인과 원고는 입뻥긋 못한다. 판사는 히스테리도 논리적이다. 아이와 낚시를 했다며 살갑게 말을 건네 오는 비서에게 조차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꾹 누르고 남편이 가출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아파트 관리인에게 새 열쇠를 주문해 비서에게 전달을 시킬 뿐. 남편에게 조차 속마음을 털어놓기보다는 바람피운 행위에 대한 벌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듯 현관문 열쇠를 바꿔 집의 출입권을 박탈하는 그녀다.


전쟁 같은 일상 가운데서 그녀는 다시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재판장의 판사석 입장문을 노크한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린 '여호와의 증인 신자 소년의 수혈 거부'사건을 판결할 시간이다. 병원 측과 아이의 부모가 벌이는 논쟁 장면은 마치 진짜 법정에서 재판을 참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우자를 방치하고 일에만 몰두한 0점 아내는 법정 밖에 두고, 대립하는 양측의 가운데는 판사 메이만이 존재한다. 논리 싸움은 의학적 소견, 종교와 교리의 허점을 지나 수혈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A가 과연 18세까지 3개월 남았는데 소년인지 성인인지를 다투는 지점에서 정점에 오른다. 효과적인 약물치료를 하려면 피가 있어야 하고, 피가 부족한 A의 호흡은 점점 가빠져 시간이 없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다.


병원에 가서 직접 A와 대화해보고, 종교적 신념이 그에게서 나온 게 맞는지. 그가 죽음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인지하는지 판단하겠다

이런 그녀의 결정을 두고 재판 결과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유별나다", "예측 못 한 결과다", "마감시간 다 지나고 판결 나오겠다" 등 주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며 웅성거린다. 평소의 그녀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이어서 더 그랬을게다. 남편이 던진 감정의 수류탄이 그녀의 이성을 뒤흔든 결과다. 병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A의 본명은 애덤(핀 화이트헤드)이다. 그는 3개월 후면 18세로 법적 성년이 되는 아이이자 소년이고 청년이다. 그의 첫마디는 "오실 줄 알았다. 난 알고 있었다"였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야 하지만 판사는 차분하다. 



그 정도 말은 인간의 밑바닥을 들춰 서류에 담고 삶과 죽음까지도 가르는 가정법원 재판장에서 십수 년 간 들어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A를 설득하려들지 않는다. 정확한 질문 몇 마디로 그의 생각을 뽑아내 판단할 뿐이다. 그런데 A가 너무도 맑고 투명하다. 수많은 취재진을 등에 엎고 삶과 맞바꾼 종교적 신념을 산산조각 내러 온 판사 앞인데 말이다. 판사가 A에게 "판결로 너에게 수혈을 강제하면 어떨 것 같으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A는 "참견쟁이 판사 아줌마라고 생각하겠죠"라고 답한다. 맥락과 상관없이 판사에게 자식이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철저히 준비해 필요한 질문만 마친 그녀는 본인이 예고한 시간에 판결하기 위해 급히 법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지 마세요. 제가 밥 먹는 것만 보고 가세요.

평소의 그녀라면 들리지도 않았을 아이의 투정이다. 하지만 그 날, 그 시간은 우연히도 집 나간 남편이 며칠 만에 전화해서 젊은 여자와 떠나겠다며 전화로 외마디 최후통첩을 한 직후였다.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병실은 나서는 그녀의 발목을 휘감는 A의 아픈 눈동자에 침대맡의 낡은 기타가 비췄을까. 판사는 A에게 기타로 한 곡 쳐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A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한다.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닌, 동석한 법원 후견인과 간호사들이 뜨악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황당한 순간이다. '갑자기 저 여자가 왜 저러나'딱 그 표정들이다. 관객이 감미로운 판사의 노랫소리와 기타 선율에 젖으려는 순간. 스크린 한가득 판사의 감성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현실의 황당함이 뿜어져 나온다.


죽어가는 A와 '과거의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천천히 사랑하는 것이 어떠냐'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문장을 노래한 후 판사는 판결을 내린다. 여기서 영화 제목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 1989년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가 등장한다. 그녀는 판결에 앞서 아동법의 전문에 따라 해당 미성년자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했다고 전제한다.


"법원은 종교를 비롯한 A 자신으로부터 A를 보호한다."

<칠드런 액트>에서 그녀의 판결은 스포가 아니다. 수혈 이후 건강을 회복한 소년이 나중에 따져 물었듯, 영국 법원은 그동안 대부분 미성년자의 수혈 치료 거부에 대해 수혈을 강제해 건강을 회복하는 판결을 해왔기 때문이다. 진짜 스포는 이후의 상황인데, 그녀와 A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재미는 영화를 봐야지만 알 수 있으니 적지 않고 남겨두도록 하겠다. 그녀의 판결에 따라 수혈을 거부하던 A의 핏줄로 타인의 O형 혈액이 기계의 힘까지 빌려 힘차게 펌프질 하며 들어간다. 영화 초반, 그녀의 판결로 대동맥이 단절돼 사망에 이른 샴쌍둥이 중 한 명의 아이와는 대조되는 상황이다.

 

이후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녀의 논리가 결정지은 수많은 삶의 갈래들은 각자 저마다의 길을 찾아 흘러갔으나, A는 달랐다. 삶이 극단으로 흘러 법정에 세워진 이들에게 법의 잣대로 갈 길을 정해줬으나 그 후의 삶까지 판사가 책임질 의무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A의 재판은 특별했다. 판결 후 3개월 만에 법적 아동에서 성년이 되어버린 그는 모든 가치관이 바뀐 채 드디어 삶과 죽음도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됐다. 판결 당시 흔들리던 판사의 개인사가 만든 미세한 균열과 우연이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몰랐다. A의 목숨과 같았던 믿음이랑 맞바꾼 수혈로 남은 삶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라고 판결했으나. 판결대로 현실은 흐르지 않는다.


베토벤이 쓸 것 같은 가발과 붉은 유니폼을 입고 역사가 숨 쉬는 고딕 양식의 영국 법원에서 '국가'와 '법'의 동일체로 살아가는 판사. '영국 판사의 일상'이라는 주제만으로 호기심이 든다. 관객은 그의 출근길부터 일상을 함께 좇아간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판결뿐만 아니라, 우연과 필연이 엮인 우리네 삶의 수많은 결정들. 특히나 타인과 얽힌 결정들이 합리적이었을까? 옳은 것이었을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판사가 아니더라도 부모라면 나의 아이에게 그리고 고민 상담을 해오는 누구에게 나름의 판단을 내려 결정을 대신 해준 경험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나름의 기준을 갖고 판단해 개인적 의견을 갖고있는 우리다. 영화속에서 애덤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어 그저 마음으로 알 수 있는 도덕과 신념 그리고 무엇을 믿는지?'등을 판사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질문한다.


런던의 빌딩 숲 사이로 판사가 걸어서 출퇴근하는 골목길엔 몇 백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차바퀴가 지나갈 때 나는 소리마저 전통이 담겨 울리는 오래된 런던의 벽돌 바닥을 지나 등장하는 영국 왕립 재판소 건물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녀가 고속철을 타고 지방 법원을 지원하러 가는 출장길에 펼쳐지는 시골길을 보면 영국행 비행기 티켓 가격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판사의 역사적 판결과 그녀의 사생활, 심리 변화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상을 함께 걷게 만드는 영화는 여러 볼거리와 느낄 거리를 1시간 46분에 녹여냈다. 섬세한 감정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지만 영화는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 <칠드런 액트> 옆에 '아동보호법'정도로 해석을 해주었으면 어떨까 했다. '연기하는 아이라는 뜻인가? 행동하는 아이?'등 도통 제목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다.


문학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타인의 마음을 느껴보게 하는 한 편의 책 같은 영화 <칠드런 액트>였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칠드런 액트> 시사회에 다녀와서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브런치팀 덕분에 좋은 영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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