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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un 26. 2019

술기운을 빌려 아이가 되듯, 흐름에 취해 생각을 놓았다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시사회, 2019 켄 스콧 감독

"와하하하"
"꺄르르"
"미친ㅋㅋㅋㅋ"
"헐ㅋㅋㅋ"

극장 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이 지나고, 개그콘서트나 코미디빅리그의 방청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도 영화에서 맥락 없이 주인공들이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장면은 <세 얼간이>등 인도 영화에서 몇 번 경험했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뜬금없이 과장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인도영화가 어색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괜히 제 얼굴이 빨개졌었어요.


이번엔 달랐습니다.


주인공의 여정과 함께하며 현실의 긴장은 뒤로하고 생각 없이 웃고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어쩌면 우리는 기적 같은 행운보다 불행에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초반, 가난한 주인공의 어머니가 심장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습니다.

남의 불행을 목격할 때는 '그래 현실에 많이 있는 일이지. 그럴 수 있지' 정도의 생각과 얕은 연민이 스쳤습니다.



영화가 계속되며 주인공은 우연히 아주 유명한 여배우를 마주치고

또 우연히 엄청나게 큰 액수의 돈가방을 손에 넣습니다.

그때는 '에이 저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일상과 동떨어진 이야기지'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행운의 확률과 비극의 확률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며 점점 어릴 때 품었던 조건 없는 희망과 꿈을 잃어갑니다.

인생에 큰 굴곡이 없는 사람들도 다달이 꼬박꼬박 날아오는 고지서들과 밥벌이에 옅은 한숨만 늘어가요.

그렇게 조금씩 나에게는 행운이 찾아올 리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안 좋은 일에 익숙해져만 갑니다.


어릴 때는 희망과 꿈으로 가득 찼던 일상이었는데.

자라면서 현실을 알게 되고, 돈이 없으면 꿈과 희망은커녕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을 수 없음을 체득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태어나서 아버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머니는 심장병을 앓는 주인공 파텔.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마법사가 됩니다.

신묘한 손기술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아 돈을 버는 거죠.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동네 깡패에게 빚을진 주인공은 관광객의 주머니 속 달러와 스마트폰을 텁니다.


이런 주인공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이케아 매장>에 가는 것. 


그의 어머니 역시도 팍팍한 현실 속에서 항상 파텔의 아버지가 있는 프랑스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파텔은 어릴 때부터 매일 밥 한 끼 먹기 힘들고 빚을 져야만 살 수 있는 경제적 무게에 짓눌린 삶을 살았습니다.

관광객의 주머니를 털어 동네 깡패에게 수익의 반을 상납하는 일상 속에서도 그는 매일 주변을 이케아 매장으로 만듭니다.

그가 지나가는 골목 시장 물건에 상상의 가격표를 붙여 이케아 광고를 만들어버리니 말이죠.


제대로 학교도 가지 못하고, 남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야만 했던 파텔이 그나마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파텔의 세상을 넓혀줬기 때문입니다.


파텔보다 더 무거운 삶의 짐을 진 그의 어머니는 늘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이야기했습니다.

매일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형편에 꿈을 갖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구겨진 얼굴로 일상을 보내도 모두가 이해할 만한 처지의 어머니였는데도요.


주인공은 매일 힘겨운 일상을 보내면서도 꼭 TV로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챙겨보며 어머니의 심장약을 구해옵니다.

감옥에도 다녀오는 등 삶의 우여곡절을 겪은 파텔은 드디어!

손에 비행기표 한 장, 100유로짜리 위조지폐 한 장만 들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대책 없이 떠나버린 여행길에서 파텔은 운명에 온 몸을 맡깁니다.

계획이라곤 아무것도 없이요. 그때부터 그에게 '특별난'일이 일어납니다.


현실에 찌든 저의 생각이 "에이 말도 안 돼... 인과 관계가...."라며 고개를 들려고 하면

인도, 아프리카 노래의 북소리와 목소리가 심장에 닿을 듯 쿵쿵 울립니다.


생각 없이 가벼운 판타지가  전부는 아닙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운 축제 같은 영화 속에 난민, 동성애,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무거운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이 영화는 책 <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작가 로맹 퓌에르톨라는 국경 담당 경찰로 근무하며 만난 밀입국자들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녹여냈습니다.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 난민들은 이 넓은 지구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영화는 타의에 의한 여행자들이 노래하는 꿈과 희망을 웃음과 섞어 무겁지 않게 담아냈습니다.


홀짝홀짝 마시다가 달큰하게 취하는 술처럼, 정신없이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관객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개인의 삶의 지평선이 넓어지는 지점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바로 그곳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여행'은 팍팍한 일상을 떠나 낭만과 즐거움이 가득한 휴식을 의미합니다.

살아있지만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망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난민의 삶을 마주하는 것은 여행이 아닌 삶에서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난민이 되는 것도, 노숙자가 되는 것도 모두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은 뭄바이,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트리폴리 5개 도시로 쉴 새 없이 관객들을 비행기로 실어나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속고, 누군가를 속여야만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현실을 보여 주죠.

파리에서만 유독 강력한 지구의 자기장이 작동해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현상도 담았습니다.


'무일푼 인도 여행자에게 엘리트 미국 여성이 끌리는 게 말이 되나?'

라는 못된 질문이 생각할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관객의 마음을 읽었나 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질문들은 영화 속 아이들이 돌직구로 해주니 대답은 영화를 보시면서 들어보세요.


우연에 온 몸을 맡겼을 때 찾아오는 행운과 불행 모두를 그저 '카르마'-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이생에 지은 죄가 없다면 전생까지도 내가 한 일들의 대가를 치르는 것임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주인공 파텔은 업보에 무릎을 꿇지 않고 맞닿들인 불운을 해결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습니다.

주인공은 대책 없이 떠난 여행에서 벼랑 끝에 몰려서야 계획을 만들고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목표를 이룹니다.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리며 그의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매일 돈이 부족해 허덕이는 파텔, 꿈을 꾸는 파텔, 불행한 일을 당한 파텔, 행운을 마주친 파텔, 절망하는 파텔, 사랑에 빠진 파텔...



인생을 살며 마주치는 악인도 의인도 모두 웃으며 넘기는 파텔과 그의 어머니는 관객을 향해 말합니다.


"예상치 못한 불운과 행운에 무너지지 마라. 정신 차리고 너의 인생을 책임져라"

매일 새로운 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행자 성향의 사람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극도로 불안해지는 정착자 성향의 사람도.

영화는 양쪽 성향 모두의 마음속을 야금야금 긁으며 확장시킵니다.


누구나 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지만 말고 밖으로 나가서 나의 꿈도 찾고 능력껏 다른 이들의 꿈도 찾아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관객들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비행기표만 들고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에 몸을 맡겨봐도 괜찮다면서 말이에요.

어서 일어나서  떠나라고. 모두 놓고 떠나도 어떻게든 살게 되지 않겠느냐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꿈을 찾아서 운명에 온 몸을 맡긴 채 후회 없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 옆사람 신경 안 쓸 정도로 크게 웃고 다가올 내일의 행운을 그려보게 만드는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이었습니다.




* 브런치 무비패스로 좋은 영화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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