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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Aug 08. 2019

우리는 모두 필살기 하나씩은 갖고 있다

영화 <엑시트> 리뷰. 백수도 솔로도 탈출해야 할 재난!

영화 초반. 우리나라에 또 지진이 났는지 재난 알림 경보 문자를 받은 두 청년의 대화입니다.


야, 지진 이런 거만 재난이 아니야. 우리 인생이 재난이라고. 지금 우리 나이 32인데 취업이 안돼서 빈털터리 백수 신세 아니냐.

어쩌면 우리는 특히 청년은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불리며, 스스로를 잉여인간으로 부르는 현실은 말 그대로 재난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길이 없고 나 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이라는 뉴스가 매일 나오거든요. 졸업 후 바로 취업한 동기 몇은 벌써 대리와 과장으로 불리는데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여전히 취업 준비생입니다. 몇 개월 동안의 피를 말리는 취업 전형들을 뚫고 최종면접까지 갔으나 결과가 탈락이라서요.


서류 지원부터 인적성 검사, 보통은 3차 면접에 최종 임원면접까지 봐야 하는데 취준생들은 여러 기업을 동시에 지원합니다. 면접 등 각 전형별 일정 통보가 길어야 한 주 전이고, 보통은  2~3일 전에 오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죠. 그런 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몇 달간의 노력이 입사전형 최종면접 탈락으로 물거품이 됐지만 다시 일어나 구직활동을 해야겠죠. 맨손으로 높은 바위를 오를 수 있고, 철봉 위를 나는 그의 특기가 취업시장에선 무용지물이네요.



<엑시트>는 판타지 재난영화지만 스포츠 생중계를 보는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영화에 우리의 현실이 정확히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재난의 의미는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에요. 어느 날 갑자기 피할 겨를 없이 온 도시를 뒤덮는 유독가스처럼 내 삶을 위협하는 주변의 변화는 너무나도 빠르게 찾아옵니다. 천재지변만이 재난이 아닙니다. 온 나라를 뒤덮은 청년 실업 등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경제난과 사회현상도 바로 재난이라는 걸 영화는 재미에 녹여 말해준답니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테러가 평범한 일상을 부수고 날아들어 공간 속 모두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도, 국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눈 앞에서 사람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불붙은 차가 사망한 운전자를 앉히고 도심을 질주하는데 남을 챙길 겨를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낼 새도 없이 정신 차리고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살고 봐야 할 그 상황에서 타인을 구하는 의인이 등장합니다. '취업하는데 하나도 도움 안 되는 등산동아리 해서 바위나 기어올라가더니 백수신세'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는 용남(조정석). 그리고 오랜 기간 고시공부를 하다 중소규모 웨딩홀에서 알바와 다를 바 없는 월급을 받는 부지점장이 된 의주(임윤아). 이 둘은 대학교 때 산악 동아리의 에이스들이었습니다.


대기업 취업과 공무원 시험에는 도움이 안 된 암벽 등반 기술이 실제 재난에서 필살기가 됩니다. 건물주의 아들도, 기세 등등한 고시 합격생도, 장모님께 두둑이 용돈을 주는 사위도, 생활력 강한 누나도 모두 발만 동동 구르며 공황상태가 된 그때. 맨손으로 건물 벽을 타고 올라 스스로와 타인들을 구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쓰이니까요. 영화는 용남과 의주가 맨손으로 위기를 이겨가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보여줍니다.



두 손에 온 몸의 무게를 실어 스파이더맨 마냥 벽을 오르는 건 여러 번의 도전과 실패를 통해 체득한 결과입니다. 용남은 정상을 코앞에 두고 잘못된 돌을 선택해 미끄러져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땅에서는 유독가스가 올라오고, 옥상의 문이 잠겨 건물 외벽을 타야만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실패의 기억을 딛고 목표 달성에 성공합니다. 주인공은 과거의 실패에 주눅 들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자신감을 회복하고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짠내 나는 두 주인공은 어린이와 약자, 학생들을 먼저 구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배려는 보통의 영화 주인공들과는 달랐습니다.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처럼 초능력으로 모든 이들을 구하고 표정 변화 없이 "으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엄청난 과정을 거쳐 목숨 걸고 부르는 데 성공한 구조 헬기에 올랐다 무게 초과로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두 주인공은 눈물을 머금고 다른 이들을 보내겠다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보통 엘리베이터를 한참 기다려 꾸역꾸역 탔는데 발을 얹은 순간 경보음이 울려 뒷걸음질 칠 때도 아쉬움과 짜증이 밀려오잖아요. 하물며 구조되지 못하면 바로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 다 보내고 혼자 또는 둘만 남는데 의연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환자, 아이, 노인 등과 가족들을 먼저 태우고 구조 헬기에 발을 디뎠다 무게 초과로 내려 목놓아 엉엉 우는 의인들의 모습이 코믹했어요. 그러면서도 이런 이들의 현실적인 모습 때문에 더욱 그들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게 됐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손에 땀을 쥐고 게임을 할 때처럼 몸이 긴장하게 되더라고요. 스포츠 경기를 보며 응원할 때와 비슷하게요. "우리 편 이겨라! 이겨라! 달려라! 달려라!"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 순간처럼 용남과 의주의 무사귀환을 기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느라 본인의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의인들을 대신해 허구 속의 이들이라도 꼭 살아주길 바랐습니다. 영화를 보며 건물 외벽을 오를 수 있는 강한 근력이나 천으로 들것을 만들고, 로프를 묶어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법을 알지 못하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내 목숨보다 어린 학생들과 노인을 먼저 살리는 '마음'. 이 ‘마음’이 재난 상황에서 더 많은 이를 구하는 가장 강력한 필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엑시트>는 재난안전대비 교과서 같은 모습을 곳곳에 숨겨놨습니다. 지하철에서 방독면을 찾아갈 때,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밑의 점자 블록을 활용해 길을 찾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방독면의 필터는 유독 가스의 종류에 따라서 사용 시한이 있다는 것도요. 방독면을 벗기 전에 선풍기 바람을 쐬고 오염 물질을 날려 보내야 되는 것도 알려주죠. 특히 재난 상황에서 소리와 빛으로 언어의 장벽 없이 보낼 수 있는 SOS 모스부호에 세뇌당할 겁니다. 영화를 본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이 소리는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네요...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영화의 구성과 흐름에 점프가 있는 부분도 있으나 괜찮습니다. 이미 관객들은 하나가 되어 우리 편이 꼭 탈출하길 기원하니까요. 이상근 감독님과 제작진은 관람객들 모두가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한 목숨이라도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주신 것 같아요.


잠시 피부에 닿기만 해도 살을 녹이는 연기가 스멀스멀 온 도시를 덮어갈 때 소방관 등 구조 인력들이 최선을 다해도 모두를 구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사람들과 용남은 "제발 여기 좀 봐줘!!"라고 목청껏 소리칩니다. 수많은 이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나와 내 부모님 살리기에만 집중합니다. 조금 멀리간 생각이긴 하지만, 일제시대와 6.25 전쟁 그리고 60-70년대 경제난 등 재앙 같은 현대사를 지나며 우리는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뼛속 깊숙이에 새겼습니다. 옆사람보다 공부를 잘해야, 옆 사람보다 조금 더 벌어야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죠. 그래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고성장의 시대에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열심히 살아도 취업은커녕 연애도 힘든 시대가 됐죠.


영화 속에서 다소 뜬금없이 등장한 유명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모습에서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느냐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미디어와 정치 등 거대 자본과 권력이 개인들에게로 분산되고 있는 현재, 각자 개인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고. 그리고 각자도생 하는 개인들이 온라인에서 한 마음으로 모이면 큰 힘을 낼 수 있다고요.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이나 고시 등용 등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나만의 필살기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힘내라는 위로를 영화에서 받았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영화 속에는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전원 구조됐으니 안심하라는 언론도 없었어요. 정부가 신속하게 사실을 공유하고 방송에서 방독면의 유효 시간, 도시를 뒤덮은 연기의 특성,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등의 정확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해준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요.


조정석의 섬세한 연기, 임윤아의 얼굴과 몸을 사리지 않는 몰입에 더해 고두심, 박인환, 김지영 등 쟁쟁한 배우들은 아주 보통의 평범한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원한 극장으로 피서 갈 때, 가족들과 함께 보기 좋은 영화 <엑시트>였습니다. 내가 만약 비상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 시뮬레이션해보고, 지하철 탈 때마다 화재용 마스크가 어디 있는지 뭐가 들었는지 찾아보게 되는 건 재미에 더해 덤으로 받는 선물!




* 엔딩 크레디트까지 재미있는 만화로 만들어주셔서 대다수의 관객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좌석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답니다. 이승환의 <슈퍼히어로>가 이렇게 좋은 노래였음을 또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도 영화 보기 전, 후로 들어보세요! ('엑시트, 슈퍼히어로' 뮤직 비디오 CJ엔터테인먼트 공식 https://www.youtube.com/watch?v=PgJ_0BFtj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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