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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Aug 16. 2019

'온실 속의 화초'는 부러움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다.

영화 '우리집'리뷰. 2019 윤가은 감독

술에 취해 양복 입은 채로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의 양말을 벗겨드리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오빠~ 2차 간다며 왜 벌써 갔어~~? 오빠아아~~

아빠의 스마트폰에서 혀가 잔뜩 꼬부라진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전화를 받은 하나는 영화<우리집>의 주인공이고 12살이랍니다. 이를 어쩌나. 초등학생이 감당하기 버거운 아빠의 비밀을 알아버렸습니다. 매일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엄마 아빠 때문에 유리가 깨진 채 바닥에 나뒹구는 가족사진을 챙기는 것 까지는 어떻게 넘어가겠는데, 이번 일은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매일 엄마와 싸우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 믿었던 우리 아빠가 모르는 여자의 오빠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요.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우리집>의 아이들이 나름대로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귀여워서 관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가족들이 날 힘들게 해도,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일곱 번 넘어져도 아이들은 스스로 다시 일어섭니다.


이 영화 곳곳에서 아주 보통의 일상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요. 배경음 없이 달그락 수저 놓는 소리와 밥을 뜨고 입속에서 반찬들과 뒤섞이는 소리만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수십 년간 반복되는 가족들과의 식사가 숨 막히는 순간이 있잖아요. 영화는 순식간에 영화 속의 인물들과 관객이 같은 감정선상에 놓이도록 만듭니다. 밀려드는 회사의 업무, 퇴근 이후에도 걸려오는 부장님의 전화 등 사회의 짐도 한가득인데, 부모님은 아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여요.


늘 바쁜 엄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장난감보다는 요리책에 먼저 손을 댄 하나. 본인은 이유도 모른 채 반에서 한 명만 주는 선행상을 받는 아이더군요. 타고난 성향이 조용하고 남을 챙기길 좋아하는 탓도 있겠지만, 늘 바쁜 엄마를 미리 배려해 아주 어릴 때부터 홀로 자란 아이였어요. 큰 소리로 울어본 적은 있을까, 제대로 떼를 써본 적은 있을까 싶은 진지한 꼬마랍니다. 언성을 높여 매일같이 싸우는 엄마 아빠의 벌어진 사이를 어떻게든 좁히려 최선을 다하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지어서 다 함께 식탁에 앉는다면, 가족여행을 오고 가는 길에 네 식구가 딱 붙어서 즐겁게 대화한다면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 것만 같아서요.

그런 하나의 속을 모르는 건지, 알아도 무시하는 건지 사춘기 오빠는 연애하기 바쁩니다. 고사리 손으로 밥과 반찬을 만들어 한 상 차려놓고 같이 밥 먹자고 하는 동생에게 변성기가 바꾼 이상한 목소리로 "아 뭔 밥이야 이 상황에"라고 짜증만 버럭버럭 냅니다. 집에 와서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일중독 엄마, 매일 술 마시고 들어오는 데다가 여자 친구까지 있는듯한 아빠에 집안일에는 통 관심 없는 오빠까지. 다른 가족은 화목해 보이는데 대체 '우리집'은 왜 이모양일까요.


사실 문제 없는 집이 어디 있나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하하호호 화목하고 행복한 집에서 살고 계신다면 정말 큰 복을 받으신 거랍니다. 성격차이, 경제문제, 육아문제, 시댁과 친정 문제 등등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까다로운 일들을 부모님께서 정말 잘 해결해주신 거니까요. 예전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들을 보면 단순히 부러울 뿐이었어요. 그런데 삶을 살다 보니 한 사람을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가 불가능에 가까운 대단한 일임을 알게 됐어요. 요즘은 다른 이에게 피해 안 주고 본인이 맡은 몫을 해내며 굴곡 없는 삶을 사는 온실 속의 화초를 보면 질투보다는 경외심이 들 정도랍니다.


보통의 그리고 대다수의 집들은 각자만의 고충이 있잖아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집안 물건이 날아다니고 큰 소리로 싸우는 부모님, 어린 두 딸만 두고 매일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부모님 등 당장 해결할 길이 없어 보이는 큰 문제를 가진 집들도 있어요. 이런 집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버거운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들꽃처럼 스스로 자랄 수밖에 없죠.

'우리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삶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지고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오히려 어른들과 동생을 보살피고 있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했어요. 재고 따지지 않고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죠. 아무리 무거운 삶의 무게가 짓눌러도 아이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다가도 금세 헤헤하면서 해맑게 웃고 장난칩니다. 햇살에 보송한 솜털이 비치는 꼬마 여자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화면을 한가득 채웁니다. 자녀가 있든 없든 관객 모두가 얼굴에 한가득 아빠미소와 엄마미소를 짓고 있더라고요.


아이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내려진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고, 그 결정에 피해를 입는 것도 아이들이죠. 나이보다 빨리 커버린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본인들의 세상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때 묻지 않은 말간 아이들이 소화하기엔 벅찬 대본으로 '이거 연기예요'티가 나는 부분이 몇 있지만, 따뜻한 미소로 배역과 현실의 아이 모두를 지켜봤어요. 아이들의 여행 중에 숙소는(특별한 형태의 숙소인데, 영화를 보시면 아실 거예요.) 너무 뜬금없긴 했어요. 차라리 시골 할머니 댁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아이들의 성격상 모르는 집의 대문을 두드릴 것 같진 않더라고요. 영화 속 등장인물을 창조한 감독님의 깊은 고민에 따른 설정이고, 사실 우리 삶에 더 영화 같은 우연들이 일어나잖아요.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날만큼 싫어도 여전히 남의 집, 너네 집이 아닌 우리 집입니다. 부모님도 너무 힘들었겠으나, 책임감 없이 가정을 포기하려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희망을 가지고 '우리'집을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면 아이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생기겠죠. 세상의 어두움을 모두 막아서 귀하디 귀하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워주진 못하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있는 힘껏 안아주는 것만으로 아이들은 충분히 세상을 밝게 이겨나갈 거예요.


어른들은 조연인, 아이들만의 세상을 비춰준 윤가은 감독님의 영화를 보며 깔깔 웃기도 하고 찡긋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아이와 함께할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보통의 집에서 나름의 무게를 지고 무럭무럭 자란 세상 모든 아들, 딸들에게 보내는 감독님의 위로를 잘 받았습니다. 삶의 고충을 일찍 알아버린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에게 보내는 공감의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가 저의 어린날을 안아주는 기분이 들었어요. 미래의 내 아이, 우리 주변의 아이들의 세상을 지켜주는 데 돈벌이에만 집중된 에너지를 잘 나눠써야겠다 다짐해봅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좋은 영화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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