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며니 Dec 31. 2019

어느 손석희 사생팬의 나만 슬픈 이야기

나는 손석희를 동경했다.


그를 좋아해서 그가 일하는 JTBC 보도국에서 인턴을 했고, 그가 보고 싶어 손 앵커가 교수로 재직한 성신여대의 수업을 도강했다. 그의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MBC 100분 토론> 시민 패널도 했다. 손 앵커의 아들이 입학한 대학교의 신입생 환영 의례 때 그가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행사장 계단 밑을 서성였다. 소문에는 아들도 매우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궁금했으나 행사 시작도 전에 그냥 되돌아 나왔다. '가족 행사'라는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건 팬이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히 스토커의 길로 빠지진 않았다. 내 자제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손석희라는 인물은 사적으로 알고 싶지 않아서였다. 배우나 아이돌 가수를 좋아할 때는 함께 밥을 먹고 손 잡고 걷는 상상을 하며 혼자 이불을 발로 차며 킥킥댔었다. 하지만 손석희는 달랐다. 나에게 손석희는 '한국 언론이 나아갈 길'의 인간화였다. 지금도 손석희와 밥을 먹는다는 상상만 해도 음식이 목구멍에 걸려 안 넘어가는 것 같다. 반면 기사와 보도 방향에 대한 그의 평가를 듣는다는 상상을 하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너무 거창한가. 아무튼 뽀미 언니와 백년가약을 맺은 손석희에게는 이성적 호기심을 일찌감치 차단했다. <100분 토론>을 브라운관으로 송출했고 MBC 뉴스가 공정과 신뢰의 상징이던 시절. 손석희와 김주하 앵커의 신뢰도가 가장 높았고 지상파 방송 보도만이 진짜 뉴스로 인정받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뉴스 앵커를 향한 대중의 환상은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사라졌을 거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손석희' 이름 석 자 만으로 설렜던 나는 꿈을 기자로 삼았다. 누가 왜 기자가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언론사 공채 자기소개서에 지원 동기를 쓸 때마다 "손석희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라고 속으로 외쳤다.


1992년 MBC파업 당시 손석희의 사진을 16년도 더 지나고 봤을 때부터 그의 팬이 됐다.


성신여대에 다니던 친구의 수업에 들어가 훔쳐본 손석희는 학생 입장에서 신경질 날 만큼 꼼꼼한 교수였다. 한 학기 동안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상영회를 하고 평가를 받는 날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제출했던 다큐멘터리를 미리 보고 왔을 뿐만 아니라 한 학기 동안 제작 과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유명인사들의 수업에 여러 번 실망했던 나는 의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100분 토론> 진행자의 짬바로 학생들을 조대 조로 토론시키며 수업 시간을 채워도 멋있었을 텐데 역시 손석희라며 혼자 감탄했다. 당시 학생들은 손 교수의 학점이 넌더리 날만큼 짜지만 반박할 수 없는 게 더 화가 난다고 했었다.


100분 토론의 시민패널을 비롯해 대선 후보 토론회장 방청인으로 봤던 진행자 손석희의 모습은 차가웠다. 사실 토론 진행 그까이꺼 대충 시간 잘 체크하고 한쪽으로 발언이 쏠리면 조정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같은 패널에 손석희가 아닌 다른 사회자가 진행할 때면 높은 빈도로 산으로 가던 토론들을 보고 '손석희는 커터칼처럼 날카로운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의 장인이었구나.'를 깨달았다. 양팔 저울의 한쪽에 1%만 더 무게가 실려도 기울어지는데, 보도와 토론을 할 때 공정함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곁에서 지켜봤다. 손 앵커는 한 시간 40여 분동안 치열한 논리로 추를 옮겨 찬반을 설득하는 패널들 가운데서 양측에 균형추를 올려주더라.


당시 내 인생 목표는 손석희 앵커가 있는 MBC 입사였다. 하지만 JTBC를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손석희가 JTBC 보도부문 사장으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이 소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분류된 매체인 '조중동(조선-동아-중앙일보)'의 종편(종합편성) 채널에 거액의 연봉으로 스카우트됐다는 소식에 '손석희의 변절이다'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반면 당시 보수 정권 아래 진보 성향의 언론 인사들이 좌천당하던 mbc에서 손발이 묶이는 것보다는 손 앵커의 역량을 펼칠 기회라는 평가도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보도국에서의 손석희를. 인턴경력을 자기소개서에 써 언론사에 입사하기 위한 계산도 있었다. JTBC인턴을 하며 봤던 손석희는 꽤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문기자 출신과 방송기자가 충돌하던 보도국에 합리적인 문화를 경영진과 함께 만들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었다. 종편채널 개국 초기엔 이명박 정부의 언론 특혜라는 비판과 함께 시민들에게 종편채널이 방송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또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나(아나운서) 출신과 기자 출신은 직무에 선을 그어 놨었다. 기자는 현장에서 취재를 하지만 아나는 스튜디오 안에서 작성된 대본만 프롬프터(카메라 렌즈 바로 앞에 진행자가 읽는 대본이 올라가는 기계)로 읽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JTBC 안에서도 손석희 앵커가 기자의 기사를 수정한다는 건 화젯거리였다. "어디 아나가 기사에 손을 대느냐"라고 말하는 일부 기자도 있었고, "손 앵커가 내 기사를 본다니 설렌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이른 시간 출근해 보도부문 사장직, 대표이사직 등 회사의 임원 업무를 처리하면서 뉴스 진행까지 했다. 손 앵커는 혁신을 위해 구성원들을 급하게 끌고 나가지 않고 성실한 행동으로 조용히 이끄는 리더였다.

JTBC 뉴스의 시청률이 오르거나 동시간대 보도채널 중 1위를 했을 때는 손석희가 쏘는 도미노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선배와의 일정이 일찍 끝나 늦은 밤 식은 피자를 한 조각 먹었는데, 살면서 먹어 본 피자 중 제일 맛있는 피자였다. 누가 봐도 화나는 소식 특히 소수자가 억압받는다는 뉴스가 있을 때는 손석희가 나지막하게 '시발...'이라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선명한 그의 목소리와 발음으로 이 욕 한마디를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기자가 되어 그와 함께 일을 하면 지겹게 듣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손석희와 먼 거리를 유지했다. 사장은 기억도 못하는 흔하디 흔한 발에 채이는 인턴이었던 내 주제를 망각한 채.


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도 손석희 앵커 덕분에 맞았지만 그는 전혀 모를 거다. 당시 마포구청에서 성 소수자들이 낸 홍대 앞 축제를 위한 허가 신청서에 '혐오감을 조성하므로 불허한다'라고 통보한 사건이 있었다. 추운 겨울 성소수자 20여 명이 마포구청 앞에서 시위 중이었다. 당시 시위를 주최한 시민단체가 수백 여개의 언론사에게 보도자료로 시위 장소와 시간을 알렸지만 취재를 나온 회사는 3개 매체였다. 우선 시위 영상만 담아오면 되는 일정이어서 촬영 기자님의 현장 취재에 인턴인 내가 짐이 되어 따라갔다. "저희는 혐오스럽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냥 여기 있을 뿐입니다!"라고 외치던 가녀린 성 소수자 단체 대표의 눈빛과 목소리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촬영기자 선배가 시위 장면 스케치 촬영을 마치고 마포구청 건물을 찍으러 갔을 때, 열심히 성소수자 단체가 주는 자료를 읽고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명함을 받고 궁금한 걸 질문해 사수에게 보고했다.


그날도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이슈가 쏟아져 뉴스가 넘쳤다. 그런데 앵커와 단독으로 5분 정도 대담을 나누는 초대석에 성소수자 단체 인터뷰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성소수자 단체 대표를 섭외해야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그런데 성소수자 단체 대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직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못해 뉴스를 통해 부모님이 당신이 성소수자임을 알게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부대표가 인터뷰를 진행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를 보고하며 인터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손석희를 비롯한 의사결정권자들은 단호했다. 그렇게 성소수자 단체 부대표가 jtbc 뉴스 1:1 대담형 초대석에 출연했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뉴스가치가 없어서 취재조차 하지 않았던 사안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소수자의 편에 서는 jtbc 보도국과 손석희를 향해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얼마 후 나만 빼고 인턴 전원이 모인 회식자리 2차 맥주집에 손석희가 등장했다. 그날도 선배의 외부 취재일정이 늦게까지 계속돼 손석희가 왔다는 회식자리로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참석하지 못해 동기들 여럿을 붙잡고 대체 손석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손 앵커는 별 말이 없었다고 한다. 직급 차이가 많이 나는, 특히나 곧 떠날 인턴들이 단체로 모이는 회식자리의 필수 코스인 '각자 느낀 점 말하기'시간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 한 인턴이 "취재의 처음과 끝을 경험했고, 나중에 입사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손 앵커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모르는 거지." 한 문장 속에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담고 상대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사실만을 말하지 않았나! 아무리 본인이 인턴 일을 열심히 했어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그 말을 어쩜 저렇게 깔끔하게 할까. 숨겨진 사생팬이었던 나는 저 말을 전해 듣고 손석희의 말이 너무 섹시해서 침을 흘릴 뻔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언젠가 손석희 앵커와 협업하는 기자가 될 거라는 낡은 꿈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석희가 2020년 1월 2일 <신년 대 토론>을 마지막으로 jtbc 뉴스 앵커직을 후임에게 물려준다고 발표했다. 적어도 10년 이상은 그 자리에 있을 소나무 같은 어른으로만 동경했던 나는 아무도 모르게 머쓱해졌다. 그리고 혼자 슬퍼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딱 한 방울. 늘 남들보다 느리고 체력이 떨어졌던 나는 손석희의 '지각인생'이라는 글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 대단한 손석희가 본인은 남들보다 5년씩 늦었다니 나도 10년쯤은 늦어도 괜찮다며 씩씩하게 일어나 다시 걸었다.


그를 향한 열렬한 팬심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언론인이 되겠다는 내 꿈과 먼 거리 사생팬 생활을 돌아보니 여전히 손석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하다. 모든 공인이 마찬가지겠으나 극렬하게 손석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도덕성이나 자질이 언론인으로서 적절치 못하다고까지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건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본인과 주변을 깨끗하고 단단하게 다져나가며 90~2000년대 한국사와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이다. 최근 구설에 오른 사건들은 수사가 진행 중이니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진실이 뉴스가 되는 그 어려운 일을 꿈꾸고 실천한 손석희가 성실히 조사를 받을 거니까. 그는 약자와 소수자에 집중했고 강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십 년 가까이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에 뽑혔으나 작은 스캔들을 간단하게 처리할 연줄은 만들지도 않았나 보다. 그의 강직한 성격 탓에 예상보다 빠른 세대교체가 이뤄진 듯싶다. 


손석희와 동료로 일하고 싶다는 열망에 인턴까지 했으나 물리적인 거리는 3m 이내로 가까워져 본 적이 없다. 그의 사퇴 소식에 손 앵커와 한 언론사에서 일하고 싶었던 꿈이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쉽다. 내 바람보다 이른 세대교체지만 그는 아마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다. 영어도 잘 못했는데 마흔 넘어 늦깎이 신입생으로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따느라 눈물까지 흘렸다던 손석희 아닌가. 그동안 삶을 녹여가며 국내 대소사를 보도하느라 다소 소홀했을 개인사와 건강을 챙기고, 그만의 속도로 다시 대중 앞에 서주시길 소망한다. 이쯤 했으면 산속으로 들어가 쉬고 싶을 수도 있으나 나는 이기적인 극성팬이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충분한 휴식 후 계속해서 손석희 버전 2, 버전 3으로 진화하는 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읽는 사람이 다소 소름 돋았을 만큼 그를 존경하는 원거리 사생팬도 많이 늦었지만 덕분에 기운 내 느리고 묵묵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 월간중앙 2002년 4월호 ‘내 인생의 결단의 순간'코너에 손석희가 쓴 수필 '지각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