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홀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기며니 Dec 26. 2019

양준일이 유승준 될 뻔했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있었다.

여권 가진 사람이 소수였고 염색한 연예인의 TV 출연을 막던 90년대 초중반. 해외에서 공부해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며 머리색을 화려하게 바꾼 젊은이들을 저렇게 불렀다.



이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사상도 튀었다. 모두가 검은 머리를 하고 사회가 강제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해외에서는 말도 안 되는 국내 인권 탄압을 보며 오렌지족은 "오 마이 갓"을 외쳤다. 그렇다고 그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 건 아니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며 미국물 먹은 옷차림으로 자유분방한 연애를 했을 뿐이다.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 다 하는 그들은 한국사회에 여러모로 충격을 줬다. “방송국 이름은 모두 영어인데, 음악에 영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라니 이해가 안 간다.”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한 양준일 역시 당시 오렌지족으로 분류됐다.


사상과 자유를 억압해 기반을 다져온 기득권층에게 오렌지족은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부 유학파 출신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는데 토종 한국 젊은이들까지 오렌지족을 따라 염색하고 오토바이를 타며 비행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이름으로 부르며 반말한다던 미국 문화야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국인의 탈을 쓴 외국인들이 한 살 많은 이에게도 깍듯한 존댓말을 쓰는 동방예의지국의 질서를 파괴하기 시작한 거다. 오렌지족은 억압된 일상에 끊임없이 "Why?(왜?)"를 외치며 외국인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조국의 경직된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70년대처럼 경찰이 길거리에 30cm 자를 들고 다니며 머리를 목덜미까지 기른 남자와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를 버스로 잡아가 교육할 수도 없었다. 국가가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으로 장발의 젊은이를 운동장에 집합시켜 몽둥이질하던 때가 불과 양준일 활동 10여 년 전이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들은 한국 사회의 질서와 통일감을 저해하는 불순분자들이었다. 오렌지족의 뿌리는 한국이었으나 미국 시민이었기 때문에 국방과 납세의 의무도 없었다. 의무와 규제를 자유롭게 피해 다니며 사회 질서만 해치는 이들의 자유분방함이 얌전하고 다루기 쉬운 토종 한국 젊은이들을 전염병처럼 물들일까 두려웠을 거다. 기성세대는 국내 물을 흐리는 오렌지족이 싫은데 규제할 명분이 없었다.



찜찜하던 찰나. 눈에 튀는 소수 오렌지족을 밟을 논리들이 속속 등장했다.

어른들이 "싸가지 없는 오렌지족이 사회 기강을 흐린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재수 없다, 혀가 꼬부라졌다, 포크만 쓸 줄 알지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못 한다 등의 말들로 교포들을 조롱했다. 본격적인 오렌지족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수입 오렌지족의 임장을 금지합니다.'라는 제목의 안내판. '영어반 우리말반 섞어 쓰는 사람, 뒷주머니에 미국 여권을 찔러 넣고 다니는 사람' 등이 출입 금지당했다.

당시 서울랜드뿐만 아니라 동네 술집 등에도 저런 안내문이 붙었다. 초등학생들도 “한국어 못하는 오렌지족 재수 없어.”라며 교포들을 대놓고 면박했다. 기성세대가 퍼뜨린 교묘한 논리는 젊은이들마저 분열시켰다. 특히나 20대 초반 금쪽같은 2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하는 한국 국적 남성들에게 오렌지족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나와 같은 생김새에 같은 핏줄을 가진 동년배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 만으로 국방의 의무를 피한 채 한국에서 자유로이 사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을 거다. 미지의 땅 미국에서 신문물을 흡수해 영어를 멋들어지게 쓰는 금수저를 향한 질투와 상대적 박탈감도 컸을 거다. 이랬던 시절에 천진난만한 미국인 양준일이 나타난 거다.


헌법보다 위에 있다는 ‘국민 정서법’상 양준일은 존재만으로 위법이었다. 1992년 양준일에게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게 싫다”며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비자 연장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양준일은 10년짜리 비자가 있었음에도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양준일을 한반도에서 쫓아내며 통쾌한 미소를 지은 건 그 출입국관리 공무원 한 명이 아니었던 거다. 연예계, 법조계 등 어려움에 빠진 양준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곳도 없었다. 사회정서에 반한 인물을 대다수 국민이 침묵으로 합심해 내쫓은 거다.


90년대 초반 양준일이 게스트로 출연한 토크쇼를 보면 진행자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양준일을 무례하게 대한다. '산타 클로스'를 원어민 발음으로 말하는 그를 비웃고, 한 편의 시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는 그에게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어린 생각을 하느냐"며 양준일의 말을 끊어버린다. 당시 시청자들도 양준일 편이 아니었기에 진행자의 태도는 모두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줬을 거다. 재수 없는 오렌지족을 공개적으로 놀림감 삼은 거다. 30년이 지난 지금 봤을 땐 진행자 하차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올 정도인데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그의 음악은 시대 정서를 비껴갔다.

한국인의 얼굴로 서툴게 국어 노래를 하던 미국인 양준일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차라리 양준일이 비틀스처럼 푸른 눈의 외국인이고 영어로 노래를 했다면 대중들은 그에게서 한국의 정서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일의 음악은 모국의 대중 감성을 건드리지 못했다. 날개를 꺾인 채 사회 시스템에 맞춰 살아가는 한국인들과 서툰 우리말을 미국춤에 엮어 노래하던 양준일의 감성은 동떨어져있었다. 사랑을 읊조리며 한 마리 학처럼 무대 위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그의 예술성은 30년 전엔 주목받지 못했다. 양준일 1년 후 나타난 서태지가 우리 사회의 치부와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가사로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것과 대조하면. 양준일의 노래와 춤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당시 정서와 맞지 않았던 거다.


KBS 뉴스에도 보도됐던 오렌지족 단속.

하룻밤에 직장인 월급을 가볍게 쓰던 일부 해외 유학파들의 음주 문화와 "야! 타!"를 외치며 오토바이로 과속하는 게 사회 문제로 번지며 오렌지족은 공공의 적이 되어갔다. 이무렵 양준일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동안 교포 출신은 국내 연예계를 비롯해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양준일이 국내에서 추방당하고 5년 정도 흘렀을 때쯤, 유승준이 등장했다. 유승준은 양준일과는 다르게 실력 있는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제대로 상품성을 갖추고 나왔다. 그가 부르는 노래와 춤은 시대 정서와 딱 맞아떨어져 90년대를 뒤흔들었다. 그는 오렌지족이었으나 ‘개념 있는 청년’이어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정확한 한국어 발음에 영어단어를 섞어 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 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른들에게도 깍듯한 모습의 예의 바른 유승준은 잇따라 히트곡을 내며 90년대 후반 최고의 스타가 됐다.


당시 모든 간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유승준은 병역판정 검사를 받는 모습도 전국에 중계했다. 척추 문제로 공익 판정을 받았던 유승준이 입대 전 돌연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 온 국민의 뒤통수를 얼얼하도록 후려친 것이다. 당시 유 씨의 입대 거부는 모든 한국인의 밥상에 주제로 오를 정도로 전국민의 질타를 받았었다. 그는 2002년부터 법무부의 입국 금지 처분 등을 받아 국내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당시 28세였던 그는 2년 동안 군 복무를 하면 댄스가수로서의 생명은 끝나는데, 국제적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기 위해 미국 국적을 택했다고 밝혔다.



아마 양준일도 탑스타가 됐다면 국방의 의무와 미국 시민권 포기를 강요받았을 거다.

양준일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만약 양준일의 예술성이 당시 인정을 받았다면 국방의 의무를 위한 국적 선택의 순간이 전국에 생중계된 연예인 1호가 됐을 거다. 모든 오렌지족을 대표하는 희생양이 되어 공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행복을 주장할 권리를 빼앗겼겠지.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양준일의 인생을 꺾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90년대에 '토종 한국 원주민’들의 수입 오렌지족 마녀사냥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현재 공권력의 권력남용 피해사례로 분류된 양준일 비자 연장 거부 사건 뒤엔 수많은 교포들이 모국에서 이유 없는 배척과 비아냥거림을 감수하며 흘린 눈물이 서려있다.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자란 동포들의 다양한 색깔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던 90년대 한국사회. 당시 힘없는 젊은 이었던 이들이 이제 우리 사회의 허리가 되어 양준일을 소환했다. '튄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노래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그에게 윗세대를 대신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서.


어쩌면 양준일은 '진짜' 모난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영어 단어를 많이 섞어 쓰던 양준일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교포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나섰다면 지금과는 이야기가 매우 달라졌을 거다. 오렌지족을 대표하던 양준일은 운 좋게 외국인에게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요구하는 거센 화살을 피해 갔다. 거슬리는 말투와 사상을 제거하고 등장한 유승준이야말로 진짜 모난 돌이 되어 온 국민의 욕받이가 됐다.


우리는 아직도 튀는 이들에게 쉽게 정을 때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모든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말 아닌가. 대다수는 모난 돌이기보다는 편견이라는 끌을 들어 정을 때리는 사람일 거다. 튀는 사람을 다듬어 어떻게든 주류에 맞추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 발로 나갈 때까지 괴롭히는 잔인함을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봐왔다. 침묵 역시 동조임을 우리는 알지만 괴롭힘 당하는 소수를 구할 방법을 아직도 모른다. 양준일을 추방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한 이는 사회 한가운데서 죽을 만큼 물어뜯긴다.


대부분 문장의 주어가 '나'인 영어와는 다르게 '우리'를 주어로 사용하는 한국은 유난히 결속력이 강한 민족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우리 엄마 등이 내 나라, 내 엄마보다 편한 우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시절을 오랜 시간 겪었다. 한반도에 전쟁 없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는 고작 현대 60여 년에 불과하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침략에 시달리며 '우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 그래서 유독 우리와 다른 것에 민감하다. 피부색 등 외모가 다르면 거침없이 양놈, 검둥이, 튀기, 코쟁이 등으로 분류해 배척했다. 굳이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아도 우리와 다른 외모와 사상을 가진 이들까지 챙기면서 가기엔 나하나 먹고살기도 빠듯했으니 말이다. 외모는 한국인이라도 국적이 다른 이들 역시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낙인찍어 여전히 눈을 흘기고 있다. 외모와 국적이 한국인이더라도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여성을, 성적 지향석이 독특한 이들을 여전히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모난돌에게 가혹하다

유승준이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 하겠다고 외치다 번복한 건 공인으로서 책임감 부족이 맞다. 모든 남성이 소중한 2년을 국가에 헌납하는 게 강제되는 대한민국에서 '형평성'은 강제 징병제를 계속하는 유일한 논리라서 더 그렇다. 당시 대중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입대를 외치면서도 속으론 제대 후 가수 생명이 끝날까 봐 두려웠던 스물여덟의 청년. 대다수 재력가와 정치인들, 그들의 2세가 했듯 쥐도 새도 모르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해외 국적을 택하거나 군면제를 받지도 못했다. 미국인 유승준은 "왜 외국인 노동자가 국적을 바꾸고 군대를 다녀와야만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가?"를 맨 처음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었다. 법무부와 출입국 관리소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징병제의 한계와 국내 남성들의 기본권을 논의하는 대신 무섭게 유승준 죽이기를 시작했다. 병역 기피를 위해 국적을 포기한 사례가 2005년까지 약 4,500건 가량인데 보란듯이 유승준만 입국 금지를 시키면서.


만약 유승준도 양준일처럼 아무 말 없이 사랑하는 음악과 조국을 포기하고 식당에서 서빙하며 30년을 보냈다면 금의환향할 수 있었을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국내법과 제도의 부당함에 항의해온 유승준. 유 씨와는 다르게 양준일은 영문 없이 쫓겨난 후 증오가 아닌 비워냄을 택하며 음악과 꿈을 마음에 묻고 좋은 가장을 목표로 성실한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가장 행복했던 양준일은 미국으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나며, 한국에서 데뷔해 꿈을 이뤘던 순간을 ‘쓰레기를 버리듯’ 버리고 또 버리며 살았다고 했다. 무고한 자신을 차 버린 조국을 혐오하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운 시를 쓰듯 말하는 양준일에 수많은 이가 열광하고 있다.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할 때 양준일은 과거를 계속 쓰레기통에 버리듯 계속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음에도 항의 한 번 하지 않은 착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양준일을 향해 대중은 손뼉 치며 열광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가혹하게 던진 돌에 맞아 별이 되어버린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90년대 양준일 공연 영상에 댓글로 고백하는 이들도 여럿이다. 그를 추방한 것도 소환한 것도 철저히 대중 입맛대로다. 꺾여버린 양준일의 꿈과 예술성이 30년 만에 모국에서 날개를 달아 당사자와 수많은 이에게 행복을 주는 모습은 한 편의 영화보다 감동적이다. ‘한반도에 너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비자 연장에 도장을 받지 못한 존 양과, 입대 번복으로 입국과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스티브 유는 같은 모습으로 모국에서 모질게 추방됐다. 두 명의 교포 모두 당신의 삶을 난도질한 모국을 버리지 못하고 몇십 년 동안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유승준만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나 국적 상실을 신고해야 병역이 면제되는 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2015년 아프리카 TV에 출연해 70분 동안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려 죄송하다며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얌전히 추방당해 꿈을 포기했던 양준일처럼 순결한 피해자로 인정받아 소환을 당해야만 국내에서 활동할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지난 십여 년 동안 죄송하다고 눈물 콧물 흘리며 이제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싶다던 유승준은 올해 대법원에서 ‘영사관의 비자발급 거부는 위법’ 이라는 판결을 받아 대한민국 입국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정서법을 비롯한 법무부와 외교부의 대법원 재상고 신청에 막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인데 이미 비호감으로 낙인찍혀 상품가치가 떨어진 유승준에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동정심으로 대중들의 팬심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유승준 덕분에 다니엘 헤니, 헨리, 박재범, 타블로, 추성훈 등 수많은 외국 국적의 연예인을 비롯한 교포들이 국내에서 별 탈 없이 활동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아직도 유승준은 '공공의 이익에 명백한 해가 된다'는 이유로 한국땅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양준일이 영어 단어를 가사에 너무 많이 써 우리말을 해친다는 이유로 방송활동을 할 수 없던 시대는 끝난지 오래다. 이제는 형광색으로 염색을 한 아이돌과 영어, 중국어, 태국어 등 자국의 언어를 쓰는 연예인들의 방송활동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다. 일찍부터 다른 나라가 그랬듯 외국인에게 국방의 의무를 강제하기보다는 그의 예술성이 국내 경제에 만드는 고용과 소비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해외 국적 연예인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의 군필 여부를 냉정하게 따지기를 그만둔 지금. 손흥민 같은 스포츠 스타는 법이 규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군면제를 받고, 방탄소년단 등의 예술인은 군면제를 받을 길조차 열리지 않았단 사실이 놀랍다. 유승준의 군입대 거부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한 젊은이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은 채 군 복무 관련 법안 논의와 개정을 확장하지 못했다.


이제는 튀는 이,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집단 총격을 멈출 때가 됐다. 국적뿐만 아니라 성별, 나이, 인종, 종교, 성적 지향성 등 우리와는 다른 소수 의견들을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 수 없는 시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사회는 당당하게 앞선 생각을 주장하는 이에게는 가혹한 여론의 매질을 한다. 이제는 특정인이 궁지에 몰렸을 때 당사자 탓만 하지 말고 왜 피해자가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시대와 사회로 눈을 넓혀보는 건 어떨까.



피해자가 선량한 모습이어야만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힘 있게 목소리를 내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며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누구도 하지 않는 주장을 먼저 하는 사람은 만인의 공격을 받는다. 꿈쩍 않는 세상을 바꾸는 건 늘 모난 돌들아니었나. 튀는 소수자는 다수의 편견과 다수가 만든 법에 삶을 파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들이 자신의 몸이 부서져라 세상과 있는 힘껏 부딪힐 때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이 됐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금도 누군가는 또다른 혐오와 배제에 삶이 파괴되고 있다.


온 국민의 응원과 사과를 받으며 시간을 거슬러 양준일이 선물처럼 돌아왔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받는 모두에게 그는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양준일의 고통이 컸던 만큼 돌아온 그를 향한 대중들의 환호가 커져가는 건 슬픈 모순이다. 양준일과는 다르게 다소 역동적이고 목소리 큰 모난돌들도 우리 사회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으면 한다. 얌전한 피해자만이 '우리'로 인정받아 대중의 쓰다듬음을 받는다면, 앞으로도 부당한 배척의 희생자들은 항의 한 번 못하고 홀로 눈물 흘리며 대중에게 구원받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펭수는 자폐아를 닮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