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며니 Sep 16. 2023

샤넬·에르메스 70% 할인

본사 직원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다. 명품을 파는 회사도 사무실은 회색 파티션에 어디에서나 볼법한 연회색 책상이 줄지어 놓인 무채색 공간이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의 화려한 옷차림에 개성 있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목에 얹는 시계를 집 한 채 가격보다 비싸게 파는 명품 그룹도 직원 월급은 19,900원짜리 티셔츠를 파는 회사와 엇비슷하게 줬다. 매장 판매직원부터 본사 관리인력까지.


매장에 서서 손님을 응대하는 판매직군과 사무실에 앉아서 전국 매장의 모든 것을 숫자로 보고받는 본사 직원을 가르는 채용 기준은 종이 한 장. 4년제 대학 졸업장이었다. 그럼에도 문자와 카톡으로 은밀한 지령처럼 전달되는 직원할인 행사 일시와 장소는 관리 직군만을 대상으로 했다.


5000만 원 넘는 시계 천만 원 빼준데!

대리 한 명이 뒷자리 동기에게 작게 이야기했다. 천만 원을 빼줘도 대리 월급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격인데. 본사 인사팀에서 전 직원의 인사기록 카드 전산화와 인사 시스템 업데이트 업무를 맡았더니 지나가는 직원들 위로 그들의 연봉이 숫자로 보였다. 티셔츠마저 300만 원인 명품 브랜드들의 물건은 떨이 처리를 해도 범접할 수 없는 가격이 대부분이었다. 가방과 보석은 80% 넘게 할인을 해줘도 인턴인 내 월급으로 카드한도를 한참 벗어나 할부도 불가능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몇몇 임원급을 제외하고는 범접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차보다 비싼 시계와 보석 역시 몇 분만에 재고가 소진됐다. 직원들은 빚을 내서라도 사두면 나중에 혼수 등 다 쓸 데가 있다면서 연봉보다 높은 가격의 물건을 모셔갔다.


샤넬, 루이뷔통, 까르띠에, 에르메스, 몽블랑 등등 상표만 봐도 아는 명품 브랜드들은 대부분 하나의 모회사에서 관리한다. 예를 들면 LVMH(루이뷔통 모엣 헤네시)사에 디올, 루이뷔통, 셀린느, 불가리, 티파니 등이 소속돼 있다. 보통 유럽에 본사를 둔  명품 회사의 한국 지사는 세계 1, 2위를 다투는 폭발적인 매출에 비해할 일이 많지 않았다. 디자인과 생산, 시즌 전략 기획 등 경영의 핵심은 해외 본사 담당이었다. 그래서 한국 지사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번역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내 인력 교육자료부터 고객 마케팅과 홈페이지까지 모두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고상한 취향을 거스르지 않는 판매직원을 뽑고 교육해 매출 실적을 보고하기만 하면 됐다. 억 단위의 제품을 파는 브랜드들을 거느리는 공룡 기업은 고급스러운 브랜드의 화려한 옷을 입고 소속 직원들마저 홀렸다.


점심시간 직원들의 대화는 대부분 자사에서 판매하는 각종 명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새로 업그레이드된 판매 교육 자료 번역을 담당하는 직원은 스위스 장인이 일 년 넘게 손수 제작하는 시계 속 부품의 예술적인 무브먼트에 대해 홀린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판매인력 교육을 담당하는 과장은 매장 직원으로부터 들은 5억짜리 보석의 주문, 제작 스토리를 경건하게 읊조렸다. 해외 지사와 격차가 큰 직원들의 연봉과 복지 등 처우에 대한 반발은 대화 주제에서 열외였다. 매출은 전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직원 처우는 최하위 수준이었고, 종종 본사에 항의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은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평생을 모아도 살 수 없는 보석과 시계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 그리고 그들의 거대한 소비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었을 뿐.


150만 원짜리 신발 43만 원 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던 나였지만 임직원 대상 비밀 할인 공지에는 애써 눈과 귀를 닫아야 했다. 명품은 90%를 할인해 줘도 쳐다도 못 봤던 나의 팔목을 잡아끄는 신발 세일 공지였다. 출퇴근 길에 늘어선 명품 매장들을 지나다니다 육각 유리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던 그 예쁜 신발이 사진 속에서 나를 불렀다. 사이즈도 딱 내 발사이즈였다. 하자가 있는 물건인지, 전시 상품인지, AS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던지 상관없었다. 발을 밀어 넣고 걸음을 걷는 매 순간마다 43만 원 가격표가 눈앞에 서성이겠지만, 남들 눈에 명품이면 됐다.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그 신발은 나를 마법처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줬다. "와, 이번시즌 신상 아니야? 품절돼서 구하기 힘들다던데 어떻게 구했어? 진짜 예쁘다." 뭘 입고, 뭘 신어도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는데 40만 원에 진심 어린 관심과 찬사를 살 수 있었다.


한 학기 등록금보다 비싼 가방을 시즌마다 바꿔드는 친구들 틈에서 에코백을 들고 '가방이 책만 많이 들어가면 되지'라며 자위했었다. 삼만 원짜리 에코백이었어도 제조사의 철학과 디자인, 질감, 무늬 등을 꼼꼼하게 따져서 산 남들과는 다른 에코백 아니었던가. 친구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에코백을 사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부담감과 기분으로 600만 원짜리 가방을 사고 골랐을 뿐. 능력이 출중한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 아래 태어나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걱정 없이 철마다 1등석을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가방을 엄마와 함께 사는 게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딱히 명품 가방이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의 구김살 없는 대화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인생의 무게도 잘못된 정책들의 구린내도 있는 집 자식들에게는 감히 닿지 않았다. 누구도 힘 있는 집안의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명품 가방은 방패요, 고급 코트는 그들의 갑옷이었다. 누군가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만지면 소리가 지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는 그들의 천만 원에 육박하는 가방. 공강시간이면 모여서 이번 시즌 신상을 만든 디자이너와 디자인 철학을 이야기하는 그녀들의 대화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급스러운 향수향이 더해졌다.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이 부도나서 휴학을 해야겠다는, 어중간한 성적으로 빚 많은 집안에 대학 등록금을 대 달라고 말할 수 없어 일찌감치 핸드폰 파는 가게에 취업한 나의 동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와는 빛깔이 달랐다.


대우가 다르다니까 대우가.

제작에만 6개월이 걸리는 명품 부품의 주문서를 처리하는 선배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귀에 울렸다. 명품 시계를 차고 나간 날 모두의 시선과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당연하고 심지어 친구와 가족도 본인을 다르게 본다고 했다. 매일 하는 일은 인터넷 쇼핑보다 단순한 일이고 연봉은 쥐꼬리지만 모두가 그를 외국계 명품 회사에서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점심 사 먹을 돈이 없어 50만 원 카드값을 다음 달 리볼빙으로 미루면서 샀던 명품 구두를 신는 날마다 가방에는 늘 만 오천 원짜리 신발을 챙겼다. 비가 와서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오래 걸을 것 같으면 바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상하지 않고 신어야 하니까. 명품 로고가 반짝이는 신발은 나에게 보석과도 같았다. 좋은 신발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을 되뇌면서 누군가 내 신발을 볼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다.


육아 휴직으로 공석이 생긴 인사팀과 회계팀에 정직원 전환 기회가 있는 임시직원 채용에 선배가 나를 추천해 준다고 했다. 입사를 하려면 평균 70장의 자소서를 써야 할 만큼 취업시장이 얼어붙었던 때 좋은 제안이었다. 게다가 근무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명품 그룹 사무실에서 야근은 회계 감사 기간에 회계팀을 제외하고는 전 직군이 일 년에 한 번도 하기 힘들었다. 한국 지사장을 비롯해 임원진 대부분이 외국인이기도 했고 업무가 많지 않아서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정해진 일만 빠르게 처리하고 내 정신도 온통 직원 할인에만 쏠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낮은 처우와 복지를 항의하는 직원들을 대체할 인력 풀이 넘쳐난다는 인사 부장의 말에도 더 이상 신경이 거슬리지 않았다. 옆 건물 타 명품 브랜드에서 이직해 온 차장 덕분에 입수한 명품 화장품 직원할인에서 평소에 갖고 싶었던 립스틱과 클렌저를 사는 일이 더 중요했을 뿐이다.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을 가볍게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할인을 해주고 짬처리를 해주더라도 여전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매일 보고 듣는 자료에서 몇 천만 원과 몇 억짜리 상품들이 없어서 못 판다는 걸 볼 때면 이상하게 보통 시중 제품보다 0 하나 더 붙은 크림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급매] 열 번 정도 신었습니다. 삼십 오만. 네고 불가능


급전이 필요했던 나는 결국 온라인 중고 사이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샀던 명품 구두를 내놨다. 직원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샀던 직원 할인 명품 화장품은 150만 원 카드빚으로 남았다. 분명히 버는 것에 몇 배를 쓰면서도 위기감이 아닌 행복감을 느꼈다.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 착 감기는 구두를 신고 사람들의 가벼운 찬사와 동경에 취했지만 그 구두는 내 발을 위한 게 아니었다. 직원 복지의 탈을 쓰고 여전히 원래 가치보다 비싼 가격으로 내 영혼을 잠식하던 명품들이 나를 통제 불능상태로 만들기 전에 빨리 떠나야 했다. 발과 붙어 떨어지지 않고 밤낮으로 제 멋대로 춤만 춰대서 결국은 발목을 잘라버려야 했다는 빨간 구두처럼.


그제야 대리석 위에 놓여 목장갑을 껴야지만 만질 수 있는 가방을 판매하는 직원이 입은 기본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조끼가 보였다. 당시 백화점 측의 제지로 판매 직군들은 그 조끼를 몇 분 입지 못하고 벗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제가 된 지점 직원들의 인사카드를 찾으면서 인사팀 부장에게 그들의 주장이 법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언질을 주는 정도였다. 신규 인력들에게 가장 순수한 등급의 다이아몬드를 설명하는 지침을 새로 교육하는 바쁜 날이라 무거운 이야기는 몇 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황금알을 낳는 명품 브랜드들을 거느리는 외국계 기업에서의 안정은 아직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채용에 나 대신 다른 친구를 추천해 줬다. 매일같이 상대적 박탈감을 보고, 듣고 만지는 일상 속에서 휘청이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었다.


재고 또는 손상된 제품을 불태우지 않고 임직원에게 짬처리하면서 그 비용을 복지비로 처리하는 명품회사지만 받는 직원은 이 처우를 은혜롭게 여긴다. 내가 살 수 없는 우아한 삶의 껍질이라도 사도록 허락받는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일 거다. 보자기 크기 스카프 한 장이 할인해도 한 달치 월급보다 비싸지만 이마저도 본사 직원과 지점 직원에게 살 수 있는 권한의 차등을 둬야 할 만큼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제품들. 사람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다고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삶을 숫자로 환산한 화려한 물질 앞에 놓인 내 마음이 한없이 초라했다.


이전 05화 미스코리아 하려다 미스협찬사 때려치웠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