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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Sep 23. 2023

왜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까

기립박수를 받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들어서는 나에게 백인 십여 명이 박수를 쳤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나올 것 같은 깊은 숲 앞 오래된 마을회관에 팀원들이 모여있었다. 마을회관동화 속 중세 유럽 마을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왔는데, 마지막 버스는 하루에 세 대만 다니는 버스라 놓치지 않으려 시계와 길을 번갈아보면서 온몸에 긴장을 하고 기다렸다.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업 계획서를 중얼거리며 외우고 너무 오래 앉아 엉덩이가 아플 때쯤엔 일어나 발표 연습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축구경기에서 골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신나게 손가락 호루라기까지 불면서 일어나 나를 향해 박수를 치는 통에 전부 까먹어버렸다.


회의실엔 의자가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쭈뼛쭈뼛 자리를 찾으려는데 자리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다. "한국에서 먼 길 오느라 힘들었겠다.", "환영한다.", "삼성의 나라 사람이냐" 등 실없는 환영 인사를 하면서 팀원들은 바닥에 한쪽 팔을 세워서 머리를 받치고 반쯤 눕거나, 책상에 걸터앉거나 창틀에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쭈그려 앉는 등 한 명도 같은 자세로 멈추지 않았다. 처음 보는 회의실 경에 열심히 눈알을 이쪽저쪽 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커다란 배낭을 벽에 놓고 등받이 삼아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은 공식 일정 시작일이고 회의 주제는 2달 동안 지역 와인축제 기획, 홍보, 실행, 마무리까지 담긴 기획안을 함께 완성하는 것.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 행사를 기록하는 동시에 보완하고 현대화해서 지역의 젊은이들이 유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프로젝트 스태프로 지원해서 선발됐다. 지원할 때 자기소개서뿐만 아니라 기획안도 함께 제출해야 했다. 축제 준비 기간 두 달 동안 시간별로 세분화할 일과 마감기한을 표로 만들고, 인력 운영계획과 예산안까지 첨부했다. 천 년 가까이 이어져온 마을의 작은 와인축제는 지난 역사를 찾아보니 사진만 봐도 따뜻한 햇살이 피부에 스미는 듯했다. 유럽 작은 시골마을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과 일을 하는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서류전형 이후 한국에서 대면 면접, 현지 와인 축제 주최 측의 화상 면접까지 거쳤다. 출국 준비를 하면서 이번 프로젝트 인원 선발은 경쟁률이 높았고 아시아 국가 출신에게 할당된 자리는 한 자리에, 해외 각지에서 전문성을 가진 인력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었다. 첫날 회의 시간에 각자 준비한 기획안을 보면서 전체 일정을 결정한다길래 늘 그랬듯 보고서를 파워포인트 발표버전으로 바꾸고 스티브잡스에 빙의한 발표준비를 했단말이다. 각 잡힌 엘리트들을 상상하면서 문을 열었건만. 웬걸. 폭탄 맞은듯한 파마머리, 어떻게 고정했는지 신기할 만큼 올려 묶을 때 손바닥 세 개는 필요하도록 숱이 풍성한 레게머리, 스물셋이라는데 빡빡 민 대머리에 온몸에 가득한 문신, 입술까지 까만색으로 칠한 고스족까지 각자의 취향을 강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 사람씩 발표를 할 거라는 내 예상도 빗나갔다. 누구는 감자칩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누구는 햄버거를 한입 가득 물고 또 누군가는 벌써 지역 특산품 와인을 포도주스처럼 홀짝거리며 수다 떨듯 회의를 했다. 두 달 동안 5억 가까이 되는 예산을 집행하는 큰 축제였고, 유네스코뿐만 아니라 지역 정부와 중앙정부까지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행사인데. 갸우뚱하고 싶은 고개를 간신히 고정하고 가만히 있는 손이 민망해 괜히 물통을 들고 물만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셨다.


두 달 동안 함께 일할 다른 멤버들이 차례로 들어올 땐 자연스러운 하이파이브 등을 했다. "기립박수도 인종차별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쯤, 프로젝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리더가 일정 관련해서는 한국에서 온 팀원의 표를 기준 삼아 토의해 보자고 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마을회관 프로젝터로 파워포인트를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처음 만난 15명의 팀원들은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았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침묵이 기본값이었던 나에게 신선한 풍경이었다.


컴퓨터가 세팅되는 동안 어색하게 서있는 내 옆에 리더가 다가왔다. 먼저 모여있던 십여 명은 프로젝트 시작일 사나흘 전쯤 마을회관에 도착해 쉬면서 다른 팀원들의 기획안을 공유해서 함께 읽어봤다고 한다. 제출 기준보다 두 배 분량을 만들었던 내 기획안이 기립박수의 이유였냐고 리더에게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 대부분 기획안을 프로젝트에서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가치를', '어떤 접근 방식으로 공유할지' 그리고 프로젝트를 준비하는'우리'가 어떻게 화합할지를 중심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내 기획안에는 기획서를 쓴 사람은 없었고 오직 프로젝트만 있었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아시아권 지원자들의 기획서는 나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나를 선발한 이유는 분량에 담긴 마을 축제 역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나를 제외한 14명은 모두 유럽 국가 출신이었다. 독일부터 자전거를 타고 온 의대생, 명문대를 휴학하고 아버지의 피자 가게를 이어받으려 피자를 만들고 있다는 학생, 전직 테니스 선수, 요가 강사와 미술 교수직을 겸업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기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첫날의 회의만큼이나 모든 활동 시간이 새로웠다. 지역 정치인과의 대담 시간은 잔디밭에 앉다가 드러누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축제를 설명하는 일정은 산속 나무에 걸터앉아서 했다. 아침이면 마녀의 수프가 만들어질 것 같은 흙집 화로에서 만든 따끈한 빵을 먹으면서 축제 물품을 지원하는 회사 담당자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를 리더가 알려줬다. 쉬는 시간이면 마을에 있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학교 학생들과 땀 흘리며 공놀이를 했고, 주말이면 흙바닥에 누워 옆을 지나가는 개미가 어디선가 찾은 투명한 돌멩이를 어디로 들고 갈지 이야기했다.


개당 500원짜리 식빵을 구워 파는 동네 빵집 아저씨도 본인 빵의 역사와 철학, 재료와 만드는 법을 설명할 땐 삼성 스마트폰이라도 만들었나 싶게 자랑스럽고 행복한 표정과 목소리로 길게 말을 이어갔다. 나와 내 자녀의 미래도 이와 같았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오늘도 내일도 다를 것 없는 일상에 먹고사는 일 외에 해외여행이나 좋은 물건은 살 수 없는 수입이지만.


숙식제공형 프로젝트라 따로 출퇴근 시간 없이 여가와 근무 시간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분위기였다. 매일 보고서를 써야 했고 하루에도 해야 할 일이 넘쳐났다.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없었고, 계획한 대로 물건이 준비되고 수주와 발주 모두 제시간에 이루어졌다. 팀원들과 자연히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팀원들은 표정이 밝았고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과도 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거울을 보니 표정 없는 나는 오늘 해야 될 일 목록만 머리에 떠다닐 뿐 처음 보는 동네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질문을 찾다 화장실로 도망쳤더라.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고 구름이 예쁘면 한참을 서서 쳐다보는 팀원들이 신기했다. 유럽 출신의 그들의 여유는 '집'에서 나온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런던, 파리 등 일부 수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에서 성인이 되면 영구 임대 주택을 제공하는 등 부모님의 도움 없이 쉽게 집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도 언제든 가기 싫은 날엔 "오늘은 가기 싫어서 안 가겠습니다"라고 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반면 우리 부모님은 작은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하려고 100원(1센트) 단위까지 적으며 돈을 모아야 했고, 나는 고 3 때 밤 10시에 학교에서 나와 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새벽 1시에 집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팀원도 있었다. 쓰러져도 학교나 회사에 가서 쓰러지라는 채찍질을 성인이 되어서도 들어야 하는 현실이 문득 스쳐갔다.


이외에도 학비가 무료에 가깝고 암이 걸려도 국가에서 치료를 해준다는 꿈같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그리고 살게 될 집은 대부분 지은 지 100년~300년 정도 된 오래된 집이라고 했다. 새로 건축한 집이나 아파트 역시 일부 도심지역에만 있을 뿐. 오래된 집들은 국가 규제에 따라 계속 다듬어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했다. 어딜 가나 오랜 모습 그대로의 길을 걷고, 몇 백 년의 시간이 만든 집에 살면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나와 주변을 깊이 보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마을 회관의 TV는 LG, 본인들의 노트북은 삼성이라며 그렇게 열심히 살고 일한 덕분에 얻은 것도 많지 않냐고 했다. 일제강점기와 끔찍한 전쟁이 끝나자마자 초고속으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는 모두가 온 힘을 쥐어짜 성공을 향해 달리며 갖게 된 것도 많지만 잃게 된 것도 많다. 그중 가장 크게 잃은 것은 우리 모두의 시간과 표정이 아닐까. 거리를 둘러보면 텅 빈 눈동자로 기쁨도 슬픔도 없이 어떤 근육도 쓰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


오늘 기분이 어떻냐고 습관처럼 묻는 물음에 한참을 생각해야만 하는 내 마음은, 일찌감치 나를 지우고 성과를 만들어야 성공한다는 우리 사회의 가르침을 받으며 사라졌다. 와인축제 준비기간은 나에게 쓸데없는 일로 가득한 일상을 최선을 다 해 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짧은 성공의 순간을 만들고, 그 후의 시간을 지탱하는 힘은 매시간을 '나'로서 누리는 힘에서 나온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듣는 시간은 프로젝트에 생긴 어려움들을 부드럽고 빠르게 해결하는 약이 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참석자가 가장 많은 나라에서 올 수 있었던 비결은 엄청난 홍보 전략과 비용 투입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학교 학생들이 친구들과 가족들과 밥을 먹으며 축제를 자랑하고 sns에 준비기간 동안 스태프들과 와인을 홀짝이면서 함께 춤추고, 그림 그리고 등산하면서 올린 사진과 영상들 덕분이었다.


매일 열두 시면 울리던 마을 성당의 종소리는 몇 천년째 계속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빛나는 하늘에 물결처럼 울리고 있을 거다. 5층 이상의 건물은 찾아볼 수 없는 마을, 관광객도 찾지 않는 시골이지만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국제기구와 대기업의 지원 사업을 마을로 가져와 가장 오래된 화장실을 깨끗하게 그대로 지키는 일을 멋지게 해낸다. 그래서인지 두 달밖에 머물지 않은 유럽 구석 시골마을이 더 고향처럼 느껴지는 걸까.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은 어떤 동네든 비슷한 집과 아파트로 가득했으니.


나의 시간은 매 분 단위로 바투게 지나 증발됐었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참고 또 참으며 어서 이 시간이 사라지길 바라는 일상. 프로젝트 기간 동안 마주한 시간은 천 년의 과거가 그랬듯 깊게 숨 쉬면서 지금을 오늘을 충분히 지겨울 만큼 누리라면서 내 굳은 어깨를 주물렀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 팀 리더가 나에게 커뮤니티를 이끄는 데 재능이 있으니 국제기구에  프로젝트 리더로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와인 축제를 했던 마을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까지 받으며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다음 프로젝트부터 유럽 전역의 문화유산과 역사 깊은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던 평화로운 일상을 업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좋은 제안이었지만 거절했다. 유럽 각지의 아름다운 장소에서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 눈물이 날 뻔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엄마 그리고 우리 가족과 떨어지기 싫었다. 입시와 취업, 내 집 마련 등 지겨웠던 극한 환경을 버티게 해 준 엄마와 가족을 떠나면 천국도 그리움의 지옥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가족 없는 낙원을 여행하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뒹구는 시궁창을 택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숲과 하늘아래 삶을 뿌리내린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제조장에 갔을 때 주인 할아버지가 나에게 한국에서 왔냐면서 혹시 번역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본 책이 있었다. 5년 전, 세계 일주를 하던 가족이 버스를 잘못 타 우연히 들어오게 된 그 마을에 1박 2일을 머문 이야기가 담긴 책인데 한국어라 못 읽고 있어 나에게 부탁했었다. 그 가족 이후로 동양인은 내가 처음일만큼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마을에 언제쯤 다시 갈 수 있으려나.



*사진 출처: 프랑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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