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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Oct 07. 2023

이해하기 힘든 결정

열린 문과 닫힌 문

참 많이도 떨어졌다. 간절히 입사를 바랐던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졌을 땐 회복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몇 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서류전형, 필기시험3차까지 이어지는 면접 그리고 마지막 전형은 출퇴근해서 실무 평가를 받는 거였다. 최종 면접까지 네 번의 면접에 두 달 동안의 실무평가를 마치고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하철 2호선 같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언론고시 준비생들은 매체에 상관없이 문이 열리면 내릴 곳에서 내리듯 때가 되면 합격한다고 했다. 나는 몇 바퀴를 돌아도 잠든 취객처럼 내리질 못하고 있었다.


탈락 후 몇 달이 지난 다음 들은 소식에 따르면 최종 선발된 인원은 회사에서 사전에 조건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성별을 기준으로는 6명 중 3명은 남자, 3명은 여자였고 나이를 기준으로 4명은 90년대생, 2명은 80년대생이었다고 한다. 합격자 중 일부는 부모님이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유명인이고 회사 경영진과 잘 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들었으나 아무리 따져도 결론은 내가 입사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매일 가장 일찍 출근하고 오전 아이템 회의에서도 칭찬을 여러 번 들었다. 걸으면서도 전화기를 놓지 않았고, 한 번 확인하면 되는 사항을 취재원에게 네댓 번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근무 평가를 해주는 선배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도 들었는데. 지원자 동기들도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생각했고 나이 어린 친구들이 힘들다고 울 때도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사주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쩌면 술을 마시면 앉은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내 술버릇이 문제였을까. 인사팀과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화장실에서 잠이 들어버렸으니 자기 통제력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최악의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입사 전형이 진행 중인 평가자 주제에 광고주인 대기업이 보낸 자료에 오류를 지적한 게 문제였나. 허위 광고의 여지가 있으며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사수 선배에게 광고주 회사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선배는 소주 한 잔 하자며 다 알고 있지만 눈 감아 온 세월이 10년이라고 했다. 지금에서야 조금씩 목소리를 낸다면서 젊을 때 당신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랬듯 떨어진 후에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음 기업의 채용공고를 찾아보면 됐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계속해서 출근 평가 첫날로 돌아갔다. 매일 써서 보고했던 근무 일지를 여러 번 읽어보면서 곱씹어봤다. 이 날 이런 행동을 한 게 마이너스였을까, 맨 앞줄에 서있어서 괜히 튀어 보였을까. 모 난 돌이 정 맞는다던데. 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나에게 하자 있는 물건 낙인이 찍혀 조만간 재고물품 창고로 보내질 것 같았다. 이미 모든 기업이 부담스러워하는 '나이 많은 후배'를 제발 받아달라고 읍소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또 시작해야 됐다. 함께 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어필하면 되는 갓 대학을 졸업한 또는 예비 졸업자인 친구들과는 다르게. 선배보다 나이는 많지만 '물지 않는 개입니다'라는 팻말을 써붙인 것처럼 다루기 쉽고 유순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내야 했다.


조직에서 대부분이 젊은 나이에 끝낸 무언가를 늦은 나이에 한다는 건 몇 배의 능력치를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류의 낭만은 없다. 한 살이라도 어려야 체력도 더 좋고, 임신과 출산 휴직까지 조금 더 일할 수 있는  쓸만한 인력일 뿐. 본인 인생에서 시간 낭비 없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해 온 사람이 회사에도 이익이 되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논리에 따라 개개인의 특성보다 모난 데 없는 둥근 사람을 선호한다. "너가 나이만 세 살 어렸어도 바로 채용됐을 거다."라는 말은 나를 위로해 주려는 말이었겠지만 탈락의 충격으로 비뚤어진 나에겐 너보다 너댓살 어린 친구들보다 덜떨어진 인간이니 떨어졌다로 번역됐다. 그나마 모든 실패에서 배울 점이 있다더니 염원하던 회사에서 5개월에 걸친 대장정 입사 전형 불합격 후엔 웬만한 탈락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역시나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 건 통장 잔고였다. 불굴의 도전정신 같은 멋진 감정이 아니었다. 6개월이 지나고 다시 같은 유형의 전형으로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회사에 지원했다. 세 달간의 평가 후 합격자만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이번에는 언론사가 아닌 다른 직종의 기업에 지원했다. 서류, 면접 통과 후 최종 전형까지 별로 달라질 것 없이 지난번의 나와 같은 모습으로 지원했고 행동했다.


이번에는 한자리였다. 정규직 전환 딱 한 명 해준다고 했다. 정년이 보장되고 퇴직금도 쏠쏠한 공무원 자리여서 그랬을까. 최종합격은 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여러 지원자가 꽤나 큰 기회비용을 치르며 지원했다. 그중 역시나 90년 대생들 가운데 딱 한 명 80년대생 동갑내기 지원자가 있었다.


곰인형같이 푸근한 외모의 그 아이는 이 기업에 입사하는 게 인생의 꿈이라고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그만둔 후 지금 이 기업에 지원하면서 몇 년째 고배를 마시다 결국 최종까지 왔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꼭 이번에 입사해야 한다고 했다. 옆자리에 앉은 내가 창밖으로 매일 나무를 쳐다보는 걸 보면서 작은 반려식물을 챙겨줄 정도로 세심한 친구였다. 조직 내 여러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성격도 둥글어 동기들도 모두 챙겨주는 그였다. 선배들에게 들은 입사 꿀팁이나 이번 전형에 도움이 되는 사항들을 그에게 알려줬다. 선하고 여린 그가 합격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최종 출퇴근 전형 역시 정말 합격하고 싶었던 회사에서 탈락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치렀다. 매일 가장 먼저 출근했고, 선배들에게는 깍듯했으며 회의 때도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주어진 일은 밤을 새워서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문제점이 보이면 사수에게 보고했으며 동기들과도 술을 자주 마시고 자주 잠들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긴장 없이 얼빠진 모습이었다. 합격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미련 없이 하루에 최선을 다했다. 힘 빼기의 기술이라는 게 이런 걸까. 물에 뜨는 순간은 온몸에 힘을 푸는 순간이라더니. 언론사 입시에 5년 넘게 실패하면서 웬만한 입사 전형은 스트레스 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마지막 출근을 3일 앞뒀던 날. 이름만 불려도 지원자 모두를 긴장시켰던 깐깐한 임원이 나를 방으로 불렀다. 업무와 관련해 내외부에서 스무 개 가까이 되는 상을 받은 그는 쌍팔년도에는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들면 뺨을 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최종 합격자라고 알려줬다. 내가 썼던 보고서에 여러 사람이 감탄을 했다고 하면서.


그 순간. 나는 입사를 포기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곰돌이 같은 그 친구의 도움으로 완성한 보고서그 친구가 나보다 더 간절하게 이 기업에 입사를 원한다고 임원에게 이야기했다. 이미 두 차례 탈락했던 지원자를 다시 최종전형까지 진행시킨 건 그 친구에게 가능성을 본 것 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회사기도 했고, 기자 하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다시 언론사에 입사 지원을 하고 있는 중이라서 미련이 없었다.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서는 처참하게 버림을 받았는데, 떨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한 회사는 나와 궁합이 맞았던 거다. 곰돌이 같은 그 친구에게서 내 모습을 봤기도 해서 아쉬움 없이 임원에게 합격 한 자리를 그 친구에게 주십사 부탁했다.


지금 돌아보면 통장 잔고가 10만 원도 없었는데 왜 저랬나 싶다. 동갑내기 지원자가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친구도 아닌데 무슨 오지랖으로 저런 호의를 객기처럼 부린 걸까. 바로 전 언론사 최종 전형에서 탈락 후 패잔병같이 몇 개월을 떠돌았던 시절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마음에 발낄질에 니킥까지 맞은 것처럼 뉴스를 볼 때마다 쿡쿡 쑤시며 아팠다. 이미 수많은 좌절을 겪은 그가 이제는 꿈을 이루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절박하게 바라던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곰돌이 너가 내 대신 저 바늘구멍을 지나 주길. 일찌감치 목숨부지를 단념하고 적군을 막아줄 테니 전우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며 소리치는 기분이 이랬을까.


전형 마지막 날. 임원은 나에게 일 년 동안 자리를 비워둘 테니 다시 생각해 보고 돌아오라고 했다. 그 해 채용의 합격자는 없었다. 곰돌이 같던 동갑내기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결혼을 했으며 개인사업을 시작한다고 알려왔다. 그 친구에게는 마지막까지 임원이 나에게 정규직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합격자가 없다는 사실이 훨씬 큰 위안이 될 걸 알아서다.


어느 자리나 원하는 유형의 인간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배역을 두고 캐스팅 오디션을 할 때 이미 캐릭터가 결정된 상태에서 열리는 것처럼. 영화가 성공하고 뛰어난 연기를 한 배우에 대한 질문을 받은 감독들은 말하곤 한다. 딱 내가 상상했던 극 중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고. 입사도 때로는 비슷한 때가 있을 거다. 지난해에 외향적이고 나이가 어린 지원자를 선발했더니 업무 능력이 별로라 올해는 차분하지만 나이가 좀 있는 지원자를 뽑기로 미리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각 기업당 일 년에 목숨이 하나뿐인 공채 게임에서 한 발씩 조심스레 퀘스트를 수행하며 합불 여부 사이에 인생을 걸었다. 합격하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안정이라는 보상을 얻고, 탈락하면 아르바이트 없이는 휴대폰 요금조차 낼 수 없는 신분으로 전락해 부모님께 죄인 된 심정으로 구부정하게 채용 공고를 뒤져야 한다. 수많은 탈락을 하며 본인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는 것은 좋지만, 내가 가진 특성이 그들이 정해놓은 틀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언론사는 최종단계에서 수십 차례 떨어졌지만 그 외 직종에서는 모두 합격, 정규직 제의를 받으면서 나와 결이 맞는 기업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생존확인을 하는 정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곰돌이 친구는 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꿈이었던 회사 이야기를 한다. 같은 자리에 두 번 탈락하고 세 번째 지원에 들어가는 손잡이까지 잡았으나 열리지 않던 그 문을 문득 생각한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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