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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Sep 30. 2023

이젠 너가 내 뒷모습을 볼 차례

우리에겐 경계가 없었다. 너네 집이 내 집이었고 내 가방이 네 가방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같은 반에서 만나 중3, 고2, 고3까지 같은 반이었다. 한 반에 45명씩 13개 넘는 반, 그러니까 60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을 무작위로 배정하는 학급에 6년 중 4년을 같은 반에서 생활내 단짝친구 운명이었다.


우리는 많이 같고 많이 달랐다. 소처럼 크고 쌍꺼풀진 눈에 약간은 튀어나온 안구. 동남아를 지나 아랍권 인종 같아 보인다는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동네사람들은 늘 꼭 붙어 다니는 우리를 자매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봤고, 이북식 슴슴한 음식 맛만 알던 내 혀는 그녀 엄마가 건더기 수프 빼고 고춧가루를 한 스푼 더해 끓여주는 라면에 얇고 기다란 파김치를 오므린 입술로 호록거리며 면에 얹어 먹을 때 짜겁게 매운맛을 익혔다. 내가 강타오빠에게 편지를 쓰면 그녀는 웨스트라이프의 키안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언니가 손목을 연필로 찔렀던 날 밤도, 내 가족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갔던 날 밤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 아버지 공장에 큰 불이 났을 때도 내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할 때도 우리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도 필요 없었다. 서로의 불행을 쪼개 한 입씩 베어 물면 불안에 요동치던 심장이 고요해졌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종일 붙어 다녔던 우리. 아침 7시 30분부터 학교에서 만나 하루종일 수업을 같이 듣고도 특별활동, 동아리 심지어 종교활동도 함께했다. 빛이 없으면 사라지는 그림자보다 가까웠던 우리는 서로에게 공기 같은 존재였다. 둘은 다툴 일도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 음식, 옷 등 취향이 완벽히 달라서 더 그랬다. 공부도 성적도 뭐든 비슷했다. 꼭 잡은 두 손 사이로 시기나 질투심 같은 건 끼어들 새가 없었다. 빗나간 큐피드의 화살도 우리를 갈라놓진 못할 만큼.


그녀가 너무 좋아해서 그의 작은 말 한마디도 곱씹고 곱씹으며 의미를 생각하고, 고백 편지까지 몇 차례 사물함에 넣었던 뽀얀 얼굴의 남자아이가 오히려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하는 나에게 끌린다며 고백했을 때도. 우리는 그저 시원하게 웃어넘겼다. 중 2 때부터 내 브라는 안대처럼 갈비뼈와 밀착돼 있는데 그녀의 가슴만 속옷을 가득 채우고 위로 넘치게 부풀어 오를 때도. 그저 목욕탕에서 깔깔거리며 서로의 몸에서 장단점을 찾으며 장난쳤다. 한쪽의 행복이 더 클 때 우리 관계의 균형추는 웃음이었나 보다. 소수만 선발하던 외국어 고등학교 선발에 나만 지원하면서도 우리가 떨어면 너무 슬플 것 같다며 설레발을 함께 쳤고, 입시에 떨어졌을 때도 우리가 같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 꼭 껴안고 웃었다.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고 3. 한국 사회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살아남는 관계가 진짜 관계라는 말에 우리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자부해 왔다. 입시, 취업, 결혼은 명확하게 삶의 사다리가 갈라지는 과정이라는데 서로가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늘 했었던 우리다. 하지만 묘한 불편함은 정확히 대학 입시 과정부터 생겼다. 공기처럼 붙어 다니던 우리지만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셈이 없던 우정이 숫자 앞에 놓이니 양팔 저울 위에 올라간 듯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합격 소식을 들은 그녀는 축하하지 않았다. 너무 닮아서 미워하는 것도 쉬웠을까. 표정만 봐도 읽혔던 그녀의 감정은 분노였다. 모든 게 비슷했던 내가 장학금까지 받고 수능 점수로 그녀가 지원한 대학보다 몇 계단 위의 학교에 들어갔고 내 이름만 현수막에 걸렸으니. 나 역시 의아했다. 인생의 모든 운이 입시에 몰린 것 아니냐는 다른 친구들의 칭찬 같은 조롱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매일 7시에 집에서 나와 새벽 한 시 넘어까지 독서실에 있어야 했던 생활이 끝나길 바랐을 뿐이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일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빛나는 날씨 아래 반짝이던 학생들의 모습, 신입생 환영회장에서 만난 잘생긴 삼수생 동기 이야기 등 모든 것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이었는데도 학교가 얼마나 우중충하고 우울한지 찐따 같은 선배들만 한 트럭이라며 입시에 실패한 자신이 싫다는 그녀의 한숨 앞에서 나의 기쁨은 그녀의 불행이 되기 시작했다. 티베트 여행 등 대학교에 가면 같이 하자고 그녀와 약속한 수많은 리스트는 늘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때부터 내 반쪽, 내 단짝은 술독에 스스로를 빠뜨렸다. 전화를 하면 취한 목소리, 만나자는 말에도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내가 좋아하던 맥콜 그녀가 좋아하던 오렌지주스 대신 앞에 놓인 소맥을 들이키며 우리에게 익숙한 편안함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녀가 술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와 둘만 있는 게 불편해졌다면서.


편입한 동기에게 정보를 얻어 그녀에게 전달하려다가도 공부는 질리게 해서 더 이상 하기 싫다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둘이 보는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둘이 만나는 줄 알고 갔던 자리엔 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취하거나 그녀가 취해 서로의 집에서 뻗을 때가 아니면,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2차, 3차를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둘이 걷던 익숙한 길을 걸으며 홀로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불행 앞에서만 완벽한 관계였을까. 그녀와 나의 처지가 반대라고 생각하니 나만 행복한 상황에 놓인 그녀의 입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감정을 숨기고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을 하기에도, 대학 정도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만큼 마음이 넓지도 못했을 거다. 더 이상은 내가 그녀인지 그녀가 나인지 헷갈리지 않았다. 내 입사소식엔 다른 대화 주제를 찾으면서도 내 퇴사 소식엔 함박웃음을 지으며 또 좋은 회사 가면 된다고 이야기하던 그녀의 마음도 입시에서 온 상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애정과 혐오, 열등감과 우열감 그리고 이질감과 친밀감이 적절히 섞여 균형을 이뤘던 우리의 관계는 계속해서 기울어져만 갔다. 그러다 단 한마디. 아주 작은 말 한마디가 그녀와 나 사이를 돌이킬 수 없이 끊어버렸다. 우리가 스물여덟이 되던 해, 그녀의 취향과 완벽히 일치하는 사람을 알게 돼 그녀에게 소개해줬다. 그와 그녀의 결혼은 내 일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다. 축하하며 눈물을 흘리려는 나에게 그녀는 "너보다 내가 먼저 가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예리 칼날 같은 말 한마디가 단칼에 20년 가까운 마음을 끊었다. 임신과 출산 소식을 전하면서 "너보다 먼저"라고 하는 그녀의 말에 완전한 끝을 택했다. 대화를 해서 서운하다고 말한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에서 나와 키재기를 해왔을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다. 내가 연락을 받지 않는 걸 듣고는 그제서야 동창들이 그녀가 나에게 가졌던 가장 큰 감정이 질투였음을 알려오기 시작했다. 입시, 취업,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선후와 우열을 따지는 관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제는 가 내 뒷모습을 볼차례다.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했다. 나에게 기를 쓰고 뒷모습을 보이려던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 너에게서 떠날 결심을 하며 마지막 예의를 지킬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보다 무엇이든 '먼저'여야 가장 행복했던 친구의 진심을 끌어안을 만한 성인군자도 아니기에.


너의 말과 태도가 서운하다고 이야기했다면 들었을 그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의지와 무관하게 뒤돌아서면 무성히 자라는 잡초처럼 돋아날 경쟁심마저 없애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절교할 마음을 품었다는 내 말은 제초제처럼 그녀 마음속 경쟁심을 한동안은 없애겠으나, 그녀의 내면을 내 입맛대로 바꾸자니 그것 역시 나에겐 고역이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녀의 성격 한구석도 역시 그녀의 것이고 난 그걸 바꿀 마음이 없었다.


축하할 일도 슬픈 일도 같은 무게로 생각했던 나와 내가 땅이라도 샀다면 배가 아팠을 그녀의 마음이 달랐음을 투명하게 드러내준 친구에게 고맙다. 대놓고 부러움을 드러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더라. 한국사회의 통과의례가 관계를 단절시키는 클리셰가 내 것이었음에 아직도 입맛이 쓰다. 정확하게 나눠진 서열 계단을 우리 사이에 들이대는 그녀에게 후회 없이 해볼 만큼 했지만, 친구보다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어 마음속 그녀의 공간을 비워버린 건 사실이다.


그 후로도 종종 연락을 해오던 그녀에게 답장을 안 한지 몇 년이 지났다. 식당에서 상에 올라온 파김치를 볼 때면, 신라면 봉지만 봐도 생각나는 아이. 이제는 상대방이 바뀌길 바라며 말하는 게 아닌 걸 설득하는 동시에 내 서운한 감정을 차분하게 전할만큼 단단해졌다. 너도 그렇겠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보고 싶지는 순간이 많다. 더 이상은 서로의 뒷모습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대학, 직장, 결혼, 출산 다 마쳤으니 먼저 갈 일은 저승밖에 없다는 농담도 준비했으니 말이다. 그녀와의 관계 그만두기를 그만둘 때가 왔나 보다.


얼마 전 잘 지내냐고 너의 문자에 답장을 한다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 깜깜한 운동장을 하염없이 걸으며 손 꼭 잡고 고요로 대화했던 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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