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덮는 것이 사랑일까
술에 떡이 돼 부모님 앞에서 똥을 지려본 적 있는가. 바지도 아니고 하얀 레깅스에다가, 당시 나이도 스물여덟이나 먹었다. 알콜을 뜨거운 콧바람으로 뿜으며 길바닥 말고 내 방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아침. 맛있는 연기를 보글거리며 피우는 안주 냄비 앞에서 다 함께 신나게 짠을 외치며 건배를 하던 장면에서 바로 내 침대 위였다. 사지 멀쩡하고 얼굴에 상처 없으니 나름 집에 잘 왔나 보다 생각했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양 볼이 부풀어 오를 만큼 세게 토가 올라와 화장실로 달려갔더니 갈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은 하얀 레깅스가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아도 다 들릴만큼 큰 목소리로 엄마에게 갈색 얼룩의 정체를 듣고 나서야 내 죄를 알았다. 아이고 내가 미친년이구나.
전두환 일가와 지인들의 죄를 폭로하는 전우원 씨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영상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체됐던 역사의 진보를 맞이한 감동이 아니었다. 생방송으로 마약을 투약하며 소리 지르고 자신이 죄인이라며 바닥을 구르는 그를 보는데 뜬금없이 내 인생에서 없애고 싶은 순간들이 스쳐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도 이런 반응이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세지기 위해 삶을 쏟고 있지 않는가. 학력, 직장, 재산, 인맥, 외모, 집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는 부모와 친구의 죄를 폭로해 혈연과 지연 등 내 편을 끊고,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받을 게 뻔한 행동을 하며 집주소까지 공개했다. 전 씨는 자신을 보호할 껍질을 없앤 조개마냥 연약한 속살을 그대로 대중 앞에서 드러내고 무섭도록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다.
저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방송에서 저를 일부러 범죄자, 죄인, 악마 이런 강한 언어로 계속 쓴 거예요. 저의 추악함을 감추지 못하게 하려고.
43년 동안 사과하지 않았던 전두환 일가의 손자 입에서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한국 사회가 들썩였다. 많은 이들의 밥상 대화 주제로 전두환 손자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전우원 씨는 알몸으로 외줄 타기를 하듯 기막히게 미친놈과 대단한 놈 사이를 넘나들었다. 전두환 일가의 은닉 재산과 호의호식하는 실상을 드러내 각종 언론의 1면을 장식하더니 언론의 관심이 가장 뜨거웠던 다음날 실시간 마약투약 생중계로 미국 경찰에 잡혀갔다. 미국에 가만히 있으면 수사도 받지 않았을 텐데, 미국과 법조문이 달라 마약 투약으로 어떤 형을 선고받을지 모르는 한국으로 날아가더니 이제는 광주에서 시민들을 만나 사과하고 있다.
삶을 걸고 가족과 지인의 비리를 폭로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스스로의 삶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는 현장을 편집 없는 원본으로 내보인 이유는 체급을 키우기 위함이었을까. 전우원 씨는 한국을 비롯해 외국까지 돈과 권력으로 손을 잡고 어떤 죄도 묻을 수 있을 만큼의 연결고리를 가진 그의 가족과 맞서야 했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의 죄를 폭로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지적질하는 넌 얼마나 깨끗한데?"라고 묻는 대중의 심리까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전 씨는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의 생리를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당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각종 기행을 저지르며 대중을 관심을 끄는 사람들을 ‘관종(관심종자)’이라고 부른다. 유튜버, 연예인 등이 대중의 관심 끌기에 성공하면 구독자 수와 인기가 늘어 수익과 직결된다. 반면 전재산 공개와 기부를 약속한 전 씨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개인 SNS생방송은 무겁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1,000여 명 정도가 시청하는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때 댓글창에 시청자가 "진짜 사과할 거면 머리 박아주세요"라고 요청하면 그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영상을 올렸다. '쇼한다, 관종이냐, 어차피 재산 상속받는 거 아니냐. 할아버지 닮아서 대머리 되면 어쩌냐' 등 날것의 호기심을 담은 질문들이 쏟아졌고, 그가 하루 네댓 시간에 걸쳐 하나씩 일일이 대답했다. 스물일곱 젊은이는 지켜보는 사람이 수치스러울 만큼 본인을 내동댕이치며 스스로를 죄인이자 악마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하루 여섯 시간 가까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그는 수많은 개인들과 직접 대화했다.
제 모든 것을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정말 여러 가지 상황의 변수들을 고려해 봤을 때 제가 방송에서 마약을 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 제 죄를 완벽히 공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당연히 저는 방송 끄고 뒤에 가서 마약해도 되는 거잖아요. 한국에 가면 저는 모든 기록이 있고, 대마초나 마약이 얼마나 남는지 모르겠는데 병원 기록도 있잖아요. 마약 때문에 병원에 갔고 저는 피할 수 없고 숨길 수 없고
착하고 올바른 말씀들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컨텐츠의 폭포에 흔적도 없이 쓸려 사라지는 요즘이다. 옳은 일도 재미가 있어야 사람들이 몇 초라도 관심을 주는 시대다. 일제강점기 때 어린 학생들을 때리면서까지 한글을 쓰지 못하게 만든 교사였던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같이 사죄의 마음으로 온 동네 빗자루질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는 사연,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조부의 이름을 빼달라는 친인척들을 설득해 선대의 과오를 인정한 국회의원 홍영표 그리고 부친 노태우의 만행을 무릎 꿇고 사과했던 노재헌 변호사 등.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뿌리를 부정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사죄를 한 사례는 꽤나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뜨거운 참회를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전우원 씨는 무명인 신분에서 시작해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지루한 주제로 많은 세대의 관심을 단숨에 불러 모으는 데 성공했다.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사과하지 않았던 전두환의 망령과 함께 5.18과 민주화 운동 유가족을 조롱하며 즐거워했던 이들의 뺨이 얼얼했을 거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라는 질문은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세상의 셈법을 가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폭로를 시작할 땐 그의 과거를 의심했고, 그가 폭로를 이어갈 땐 의도가 궁금했으며 결국엔 그가 미래에 변심하면 어쩌나까지 생각했다. 우리는 깨끗하고 올곧은 것을 보면 희망보다는 '언젠가는 변하겠지'라는 두려움과 절망에 익숙하다.
집안 곳곳에 숨겨진 검은돈의 증거를 떨리는 목소리로 폭로하는 그에게 대중들은 팔에 찬 까르띠에 시계는 얼마냐고 질문했다. 현실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욕망에서 초월한 개인은 천연기념물만큼이나 희귀해서 그가 '진짜' 선한지 끊임없이 검증한다. 타인이 나와 같은 것을 욕망하지 않을 때,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을 볼 때 보통의 사람들은 본능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전우원 씨가 폭로의 의도를 의심받지 않기 위해 택한 방식은 이용 가치가 없는 밑바닥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버리면서 전재산을 공개하고 기부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약쟁이’가 되어서야 대중들은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다고 받아줬다. '폭로와 사과를 발판 삼아 정치인 등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말보다 앞선 행동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옳은 말씀을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들조차 그의 말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저는 제 재산을 쌓을 행복도 없고 제 은행계좌 계속 공개할 거고 정말 제가 생존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고 싶어요.
그의 의도와 목적을 행동과 말로 증명받은 다음에 이어지는 궁금증은 '대체 언제까지 그가 이런 마음으로 삶을 계속할 수 있을까'였다. 돈과 명예가 아니라면 그가 바라는 보상은 긍정적인 변화일 텐데, 그것마저 없을 확률이 큰 세상 아닌가. 그가 얻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다.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괜찮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저의 진심이 전해지니까 많은 분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너그럽게 마음 푸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 반성하게 되고 여러분께 감사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라고 답했다. 전 씨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고 모든 것을 의심했다고 한다. 군대처럼 강한 위계질서아래 전두환을 신처럼 모시는 집안에서 그는 늘 불편했다. 5.18 등 가족에게 주입받은 역사와 정 반대의 진실을 알아가면서 그의 괴로움은 점점 커졌다. 사법제도가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가족들을 보며 깨달았다고 한다. 무고한 시민을 대량학살해도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찍소리 못하고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지 않은가. 증거가 없으면, 무죄를 선고받으면, 공소시효가 지났으면 죄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철학과 각종 종교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현실에 없는 판타지가 된 지 오래다. 국내외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 <테이큰>은 납치당한 딸을 경찰이 찾아주지 않아 아버지가 직접 맨손으로 강도 40명을 때려잡아 딸을 구하는 액션영화다. 최근 우리 사회의 열렬한 환호를 받은 드라마 <더 글로리> 역시 사회 제도들이 가해자의 삶을 더 찬란하게 빛나도록 만들어주는 현실을 때려 부수는 드라마였다. 중고등학생 때 친구들에게 붙잡혀 팔이 고데기에 지져지는 경험, 있는 집 자식에게 가족의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사과를 받지 못하는 경험 등은 조상의 덕을 보지 못한 탓을 해야 하나. 영화와 드라마 안에서도 사적 복수는 초능력 수준의 무술을 할 줄 알거나, 20년 가까이 삶을 버리고 칼날을 갈아야 성공할까 말까다. 보통의 사람들은 운 좋게 권력과 시스템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가하는 폭력을 비껴갔을 뿐이다.
나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각자의 생존경쟁에 지쳐 남 인생에 닥친 부조리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40년도 더 지난 해묵은 사회적 재앙의 희생자들은 집안의 먼지보다 관심이 없을 수밖에. 우리는 각자 생존경쟁을 하며 부조리한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막연히 바라고 있다. 지겹도록 같은 자리에서 보이지도 않는 깨알 같은 글씨의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사람, 손으로 꾹꾹 A4용지 앞뒤로 눌러쓴 청원서를 각 국회의원실 팩스로 매일같이 보내는 사람들. 현행법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어 그들의 억울함이 인생을 잡아먹은 것이다. 운 좋게 불운한 일을 당하지 않은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용서해라, 편안하게 잊고 살지'라고 말하는 폭력을 너무도 쉽게 가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성향을 타고난 전 씨는 이런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 가족들과 쉽사리 섞이지 못했다. 죄의 무게가 버거워 수차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전우원 씨가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은 죗값을 받는 것이었다. 당신의 죄에 더해 가족들의 죄까지. 전 씨는 감정적인 사죄에서 끝내지 않고 '더탐사'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은닉 재산을 찾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 가족들에대한 사법적 처벌의 물꼬를 트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제 가족들이 부를 내려놓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제 주변 지인들 포함해서 가진 자들은 쉽사리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원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이걸 안 하면 영혼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일단은 한국에 가서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되고 사법체계를 밟아야 된다면 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벌을 받아야 하면 받을 거고요. 이것 또한 제 이기주의 때문에 내리는 결정입니다. 제가 선한 사람이 아니고 결국은 저의 행복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누군가의 삶이 망가진 후에야 또는 집단 사상자가 나오고 나서야 세상은 타인의 부조리에 털끝만큼의 관심을 쏟는다. 전우원은 이런 현실을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다고 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세상에 불러온 순수한 어린 생명이 자라나는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전 씨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죄는 죄대로 처벌받도록 돕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16년 전에 있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스물일곱의 청년의 삶은 이미 폭로를 시작하기 전부터 불안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금전적 고통은 조금 덜했을지 몰라도 친아버지의 외도, 가족 간의 재산 다툼에 끼어 정신적으로 피폐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가족들은 군대처럼 철저한 위계질서 아래서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을 모시듯 전두환을 모셨다고 한다. 형제 자매 간에도 서로를 보듬는 게 아니고 내 돈은 내가 챙겨야하는 분위기였다. 친아버지의 잦은 사업 실패로 학비를 내기도 어려워 쩔쩔매던 상황까지 있었다고 한다. 전 씨는 어릴 때부터 자주 바뀌는 돌봄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자라 부모님이 안 계신 환경과 다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가족들이 사기를 당할 땐 그도 함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단다.
아무리 그랬어도 지금은 미국에서 연봉 1억 수준의 경영 컨설턴트에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20대가 됐으니 가끔 인스타그램에 뉴욕 야경 사진과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는 사진을 올리는 평균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회사에서 수 십억에 달하는 기업 간 계약을 성사시키고 먹는 값비싼 음식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이들을 괴짜라 부를지 모르지만, 내가 먹는 이 밥이 내가 버는 이 돈이 과연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은 가장 편안한 때 제일 괴롭다. 전 씨는 무고한 시민을 군홧발로 밟아 죽인 할아버지가 피로 쌓은 재산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가족들 틈에서는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슬펐고, 미국땅에 와서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신분에 작고 왜소한 외모로 따돌림을 당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돈 많이 주는 컨설팅 회사에 취직해서는 자신이 밤새워 쓴 보고서가 비정규직 등 약한 개인의 권리를 빼앗아 경영진의 배를 불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인정을 받아도 늘 그만 둘 생각뿐이었단다.
어릴 땐 왕따였던 때가 많고, 군대에서도 전두환의 손자라고 괴롭히는 이들도 있었다. 상처 많은 그에게 살면서 들었던 말 들 중에 가장 크게 상처가 된 말을 물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제게는 상처였어요.
희망을 품었다가 상처받고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가족을 비롯해 저를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 중에 오히려 너무나 큰 상처를 준 사람이 많았거든요.
인터뷰 중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가장 궁극의 가치인 "사랑"이 가장 큰 상처였던 삶 앞에서. 그래서 전 씨는 타인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타인의 아픔에 집착하게 됐다. 나를 향한 사랑과 타인을 향한 폭력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인물에게 전우원 씨는 복종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차가운 눈초리로 자신을 재산 분할의 걸림돌 정도로 대하는 가족들 틈에서 전 씨의 마음은 병들었다. 신이 있다면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의미 없이 죄의식만 쌓이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길이 죽음뿐이었던 지난해 12월. 전 씨는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약물을 과다복용해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때 그는 살면서 봤던 어떤 광경보다 생생하게 지옥을 경험했고 모든 사람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죄는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의 삶은 지난해 신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을 성경책을 통해서 하게 됐고 혼란스러웠던 죄와 사랑의 기준도 생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진짜 사랑을 교회를 통해 받았고, 그곳에서 믿을 수 있는 가족들을 만났다. 성경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구절들을 최대한 빠짐없이 곧이곧대로 실행해 옮기기로 결심했단다. 분당의 한 교회에서 곧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반면교사가 됐다.
아버님은 정말 하나님을 믿으시지만 그래서 회개하면 다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최소한 성경에서 배우고 공부한 하나님은 최소한 회개하고 절대 죄를 다시는 짓지 않는 것.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게 진정한 회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아버님은 아직도 입으로는 회개하는데 실제로 삶이나 이런 것에서 하나님의 회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이 믿는 세상에 많이 퍼져있는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인지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종교는 그에게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이 맞는지 살피는 나침판이다. 그의 인터뷰 답변 시작의 대부분은 '하나님'이었다. 전 씨는 "너무 기독교적인 이야기만 하면 미친 사람처럼 보기 때문에 균형(밸런스)을 잘 맞춰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성경을 이해하고 오해하지 않도록 방송에서 노력한다."라고 했다. 인생을 내려놓고 성경책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 대부분이 부끄럽다고 했다. 전 씨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넘어 그게 괴로워 못 견디는 사람인가 보다. 내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도덕적으로는 올바른지 그리고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사람.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지 돌아보고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못해 자신을 해치는 이.
그랬던 그가 결국엔 그만의 행복을 찾고 있다. 깨달음 이후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온몸이 떨리도록 두려운 순간이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세상이 던지는 의심의 눈초리에 빠짐없이 대답을 내놓으며 ‘옳은 길’을 스스로 만드는 중이다. 가장 부끄럽고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드러내 연약한 속살을 내놓고 한 사람 두 사람 자신의 편을 만드는 중이다.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와 내적인 방황을 행동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선택할 수 없었던 혈연은 그에게 더러움으로 남았지만, 먼 곳에서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댓글 하나와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사랑과 편안함을 느끼는 그다. 그에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세상에 혼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지원군이 많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에 혼자 있다는 생각을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해왔는데. 물론 저를 안 좋게 보시는 분도 있지만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도 있고 저의 뜻을 좋게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고요. 오히려 가족보다 더 따뜻하게 그런 사랑을 주시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여러분들과 하나가 된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고 한 국가를 독재했던 인물의 욕심은 자식 세대까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숨통을 죄여온 어두운 가정사는 그를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는 사람으로 바꿔놨다. 전 씨는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정신병원에서도 환자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그들과 몇 시간씩 대화를 할 때 마음 편했다고 한다. 그의 삶 속에서 금기어였던 '광주'가 상처 입어 부서진 사람들과 눈을 맞췄을 때 그에게 예고도 없이 입체적 사실로 찾아왔다.
제가 병동에 들어갔을 때 광주에서 오신 형님이 있었어요. 가족분들 신고로 들어오신 쉰 하나 되신 분이었는데, 그 형님께서 중학교 때쯤에 미국에 오셨는데 그전에 광주에서 계셨었어요.
광주 민주화운동 때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처음에는 학교 안 가서 좋았데요. 그런데 형이 나갔다 안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거기서 몇 백명의 시체랑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죽고 피 흘리고 군인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그런 광경을 직접 보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광주는 40년을 넘어 가해자 후손의 삶이 되었다. 뜨거웠던 민주화 투쟁과 노력이 그저 나쁜 권위를 좋은 권위로 바꾸는 구태로 변질되어 버린 지금. 그는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모두를 의심의 눈으로 본다고 한다. 대중들은 향후 정치권이 전씨에게 러브콜을 보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혹시나 정계에서 영입 시도가 있으면 갈 것인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은 솔직히 없어요. 기업이 됐든 정치 단체가 됐든 결국은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를 이용하는 것 같아요. 정말로 사회적 이로움만을 위해 저를 써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방송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과 직접 교류를 하려고 해요. 어떠한 정치적 특색도 띠지 않고 저를 통해서 사람들 마음이 치유가 되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의로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시고 누구나 다 언제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정치권을 비롯한 각 단체가 이해관계를 선의로 포장해 그에게 폭풍처럼 들이밀 텐데, 그는 빛 좋은 기회들에 정신없이 휩쓸려갈 만큼 멍청하진 않은 사람이다. 막대한 재산 앞에서 우아한 가면을 쓰고 뒤로는 서로를 난도질했던 가족들 틈에서 자라면서 기막힌 정무적 감각을 몸에 익혔나 보다. 전 씨는 옛날부터 죄의식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사죄 활동 등을 통해서 본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져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민주화를 거치며 늘 피 흘리는 투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히 희생과 영웅이 나왔다.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시대라는 요즘 우리는 점점 더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해져 가고 있다. 부조리는 있지만 싸움의 대상이 보이지 않는 오늘 전우원 씨가 쏜 양심의 화살이 대중의 내면에 명중했다. 각자도생의 시대 당신의 사죄에 화답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물었다.
저는 시대적으로도 제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을 하는 게 옛날에 저보다 더 큰 희생을 하신 분들이 많잖아요. 고문을 당했던 분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어요. 저는 그냥 죄인이고 진짜로 대단한 분들이 많으세요.
저는 그나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 모습이 손바닥 안에 핸드폰에서 생중계될 수 있고, 대중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잖아요.
이런 시대에 태어날 수 있음에 너무 감사해요.
그는 섣불리 숲을 그리지 않는다. 한 그루씩 한 그루씩 나무를 심는 중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멀리서 보면 국가에 의한 폭력이다. 이 폭력의 역사는 수만 개의 점처럼 개인의 삶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시민에게 총을 쏜 군인 한 사람, 그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한 사람 그리고 이 불의를 지켜보다 화가 나 시위했던 학생, 그 학생들을 비롯해 무고한 학생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했던 한 사람 등 각자의 상처가 40년째 해소되지 않은 채 엉켜있다. 그래서 전우원 씨는 이 모든 점들에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사과를 택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이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한 사람씩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상처를 흡수하고 싶다고 했다. 전우원 씨는 사진한 번 찍고 끝나는 추상적인 사과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으로 사죄를 시작했다. 상처 입고 부러진 사람들의 말을 한 사람 한 사람 듣고 그들이 눈물 흘릴 때 같이 울고 꽉 껴안는 일. 정신과 의사면 돈이라도 벌거고, 성직자라면 직업 울타리 안에서라도 할 텐데. 그냥 그렇게 상처 입은 사람 한 사람씩 만나는 일을 하는 게 그의 일상이고 행복이 된 거다.
인터뷰 중간. 필라델피아에서 전우원 씨를 보기 위해 뉴욕까지 버스 타고 왔다는 중년 여성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보행 보조기구 위에 뻥튀기 등 먹을 것을 한가득 올리고 서 있었다. 삶에 닥친 불행의 진상규명을 위해 수십 년째 정부기관 등을 찾고 있다고 하며 보행 보조기구를 타게 된 사연 등을 십여 분간 두서없이 전 씨 앞에서 늘어놓았다. 누가 들어도 해 줄 게 없는데 전 씨는 엉거주춤 서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산다고 했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오랜 세월 수백 번은 반복한 듯 줄줄 억울한 사연을 풀어놓으면서도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아들 같은 전우원 씨를 응원하고 싶어 먼 길 왔다며 힘내라는 말과 함께 전 씨를 두 팔로 껴안았다.
전우원 씨가 거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아픈 눈물이 계속해서 그의 때와 얼룩을 닦아내서인 듯싶다. 마약을 투약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손자가, 전재산이 29만 원이고 본인은 죄가 없다는 자칭 민주화 영웅이 축적한 부를 움켜쥔 가족들의 죄를 비췄다. 이제 그 거울이 우리를 비춘다. 2023년 3월의 전우원을 들여다본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
* 참고: 더탐사 인터뷰, 전두환 손자 "尹 대통령되자, 비자금 수사 줄어들 거라며 가족들이 기뻐했다"
* 전우원씨는 3.26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뉴욕 집의 모든 물품을 빠짐없이 교회 중고장터에 기부했다. 침대, 밥솥부터 조명, 포크와 수저와 휴지까지. 그가 기부한 물품은 빈민과 난민 구제에 쓰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