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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위로를 주고 싶다.

위로를 원하는 너에게 만족을 주긴 어렵다.

by 해피러브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온 가족이 함께 봉산을 오르는 길 위에서 나는 딸의 종아리에 난 작은 상처를 발견했다. 가볍게 묻는 내 질문에 딸은 오늘 겪은 불쾌한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위해 의자를 뒷편에 놓았는데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는데 그 의자에 짓궂은 동생이 앉아 버려서 일어나라고 실갱이 하다가 의자에 긁혀서 상처를 입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서로 계속 불편하게 부딪히기보다, 동생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봤니? 그래도 대화가 안 되면 선생님께 말씀드려~"라고 말했지만, 딸은 "이래서 엄마한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위로는커녕 제 잘못만 지적하잖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놀라서 다급하게 물었다.

"위로? 어떤 위로? 엄마가 그 동생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잖아~"라고 말하자,

"먼저 다리 괜찮냐고 물어봐 주고, 마음이 어땠는지도 물어봐 주고, 그 동생은 왜 그럴까? 이상하네~"라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나 하나 자세하게 원하는 바를 요청하는 딸에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상처를 봤을 때는 괜찮아 보였고, 오늘 속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잘 모르는 그 동생을 어른으로서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고요한 침묵을 뚫고 말을 꺼냈다.

"상처는 괜찮아? 아팠겠다~ 오늘 많이 속상했겠네?" 라고 말하자 갑자기 딸이 어이 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 거야~~" 라고 말하자

"엄마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그럼 너의 자녀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뭐라고 위로해 줄거야?" 라고 물었다.

딸은 말했다.

"그 동생 이상하네~ 왜 그러는 걸까? 신경 쓰지 마~ 라고, 말할거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어서 질문했다.

"그렇게 말하면 위로가 돼?" 라고 질문하자

딸은 말했다.

"먼저 공감을 해줘야 위로가 되죠~"

나는 최근에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라고 느꼈기 때문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만 있어 주면 되는 위로에 대해 쉽다고 생각했고, 가장 자신 있었는데 "함께 상대를 비난해야 위로가 된다"는 말처럼 들리니 문득 위로가 다시 어렵게 느껴졌다.


이 순간, 말을 잘못하면 딸이 다시는 고민을 털어놓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어떻게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고 이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했고, 너무 어려워서 앞서 가는 아빠한테 가서 이야기 해보라고 아빠는 뭐라고 하시는지 보자고 제안했다.

딸은 오늘 겪은 불편한 일을 아빠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빠는 "교회에 안 가면 되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고, 딸은 절망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빠보다는 엄마가 더 위로가 돼?"라고 묻자, 딸은

"그냥 아무 말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자녀 고민을 들으면 여전히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망가진 가구 앞에서 드라이버를 찾듯, 상처 입은 마음 앞에서도 ‘어떻게 고칠까’를 먼저 고민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반응은 오히려 상처받은 이에게 “네 마음보다 내가 옳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진정한 위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 상대의 고통을 마주하는 일에서 시작된다지만 어떻게 함께 상대를 욕해줄 수 있단 말인가!

딸이 원한 위로는 거창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왜 그런 아이인지 함께 궁금해해 달라”,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달라”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이 마음에 다가가려면, 나도 잠시 ‘조언자’의 위치를 내려놓고 ‘동료’로서 서야 된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감정에 이름표를 달아 주는 일이라던데. “속상했겠다”, “화가 났겠다”, “아플 텐데 괜찮아?”라는 공감의 언어는 치료제 없이도 상처 부위를 살포시 눌러 주는 온기가 된다는 건 알지만 실전에서는 "이렇게는 해봤어?", "그럴 땐 이렇게 했어야지~"다.


우리 가족이 함께 오르는 봉산의 길처럼, 위로도 ‘동행’임을 다시금 떠올린다.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아도 좋다. 다만, 상처와 슬픔의 굴곡마다 곁을 지키며 “내가 네 편이야”를 묵묵히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위로일테니.

다시 한번 "괜찮아?","많이 아팠겠다","약 발라줄까?","힘들었겠네~"등등 위로의 말을 찾아보고 외워본다.

하지만 상대를 함께 욕해주는 일은 어려운데..

공감과 위로를 주고 싶은데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위로는 갈 길이 멀다.

나도 참 융통성 없는 어른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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