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1953년 지루했던 장마가 끝나고 흙에서는 더운 김이 훅훅 일어나던 칠월 말,
세상은 긴 숨을 내쉬듯 휴전을 맞았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 같은 큰 변화가 없는 시골마을이지만
휴전소식은 마을의 공기마저 바꿔 놓은 듯했다.
하루가 다르게 동네에는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군대 간 아들이 돌아오고 젊은 남편들이 돌아왔다.
집집마다 떡을 하고 음식을 만드느라고 동네 전체가 잔치를 하듯 들썩거렸다.
사방은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로 시끌거렸고 아이나 어른할 것 없이 춤을 추듯 헐렁거리며 다녔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빛이 스쳤다.
구월이 막 시작되고 며칠 뒤, 여자는 진이의 손을 잡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동안 단 한 번의 휴가 외에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남편.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여자의 가슴을 쿵쿵 울리게 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진이는 쑥쑥 잘도 자랐다.
시아버지는 '참 기쁘다'는 의미로 첫 손녀에게 진이(眞怡)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자는 진이라는 딸의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꼭 자기 마음을 얘기하는 듯해서 진이야~하고 부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퐁퐁 솟구쳤다.
그 진이가 어느새 돌이 지나고도 여섯 달이 되었다.
크게 아프지도 않고 속을 썩이지도 않고 노란 개나리처럼 환하게 자란 보배둥이.
진이를 볼 때마다 여자는 노란 개나리를 찾아 나폴거리는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그렇게 나비처럼 상쾌하기만 했다.
역으로 마중을 나간 날, 사람들 사이로 환한 얼굴에 큰 눈을 가진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진이야~"하며 함박웃음을 날리며
달려와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 있던 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남편은 진이를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으로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 안은 남편의 팔에서 뜨거운 열기와 굳센 힘을 동시에 느끼며 마음이 벅차올랐다.
"여보, 나 왔어~"
남편은 여자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한 손으로는 남편의 오른쪽 옆구리를 꼭 끌어안았다.
남편이 돌아온 집은 오래 비어 있던 항아리에
다시 맑은 물이 차오른 듯 생기로 빛났다.
이상하게도 늘 지내오던 집이 마치 새집이 된 거처럼 반짝거렸다.
진이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제비처럼 지저귀며 웃음을 쏟아냈고,
남편은 그런 진이를 간지럽히며 아이처럼 함께 웃었다.
여자는 멀찍이 앉아
이 모습을 사진이라도 찍듯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고이 새겨 넣었다.
밤이면 진이는 아버지의 팔에 감겨 잠이 들고,
그 옆에 여자가 누웠다.
세 사람의 숨결이 겹쳐지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불안은 멀리 달아나고 가족이라는 따뜻한
신뢰가 별빛처럼 여자의 마음을 수놓았다.
남편과 함께하는 동안 달력은 잔인하게도
빠른 걸음으로 장을 넘겼다.
시월이 다가왔고,
남편은 다시 복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 했다.
마지막 밤,
등잔불 아래에서 세 식구는 오래도록 눈을 마주했다.
진이는 눈을 또랑또랑 빛내며 아버지의 무릎을 떠날 줄 몰랐다.
남편은 진이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속삭였다.
“진이야, 아버진 금방 돌아올 거야.
엄마랑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응. 난 놀고 있을게.
아버지도 공부 잘하고 와야 돼~"
남편의 목소리는 솜이불처럼 따스했고, 진이의 목소리는 마치 맑은 종소리 같았다.
진이의 대답에 남편은,
" 아유, 우리 공주님~~" 으스러져라 진이를 끌어안았다.
"에헤헤헤~~"
진이가 터트린 맑은 웃음소리가 온 방 안을 채우고 구월의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새벽 기차역,
휘파람 같은 기적 소리가 어둠을 가르자
남편은 여자의 어깨를 깊이 끌어안았다.
그 짧은 포옹에,
사랑과 미안함과 다짐이
한꺼번에 흘러넘쳤다.
그러나 여자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뭔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올라 잔잔한 손길로 남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이랑 잘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차가 떠난 플랫폼 위에서
여자는 진이의 손을 꼭 잡고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진이도 작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기차를 보며 소리쳤다.
"아버지이~"
문득 여자의 마음속에 문장이 하나 맺혔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과 나, 우리 진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해피마망의 연작 소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매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