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겹쳐진 시간
기적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끊긴 기차역엔 정적만이 남았다.
흔들던 손도 멈췄다.
기차가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보던 여자가 아이를 보고 말했다.
"진이야, 엄마가 업어줄까?"
"응, 업어줘."
눈을 비비고 있던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엄마를 향했다.
"그래, 엄마한테 업혀. 졸리면 자도 돼."
여자는 아이를 업고 플랫폼을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역사의 시계는 여덟 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대전역 광장은 이미 떠오른 햇살이 반짝이며 공중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도 엄마가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어째서 나는 엄마 생각이 안나는 걸까?
언니나 오빠는, 지금도 가끔 엄마가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보고 싶어 눈물이 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나는, '나는 이토록 매정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엄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 몆십 년 전의, 스물한 살의 젊은 엄마가 이제 두 돌이 채 안 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어스름 동이 터오는 기차정류장에 서 있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해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내 이야기의 얼마만큼이 사실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살면서, 그때그때 보고 들었거나 느꼈던 감정들과 모습들을 엮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이 이야기도 아마 언젠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엄마는,
"세 살 때 진이가 얼마나 재빨랐는지 몰라.
울며 땡깡부리는 애를 혼내려고 나오면 벌써 저만치 달아나버렸어"
아마 이 이야기 틈새에 기차역 이야기도 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새삼 울컥했던 것은
오두마니 서있는 어린 애엄마의 뒷모습에서,
열여덟 살에서부터 스물한 살까지 여자가 지나왔던 여정들이 영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부잣집 막내딸에서, 혼례식 때 살짝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본 남편의 잘생김에 기분이 좋았던 익살스러운 모습.
첫날밤에 기절을 해버린 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설렘을 간직하고 시작한 시집살이. 공부하고 군대 가느라 헤어져 있던 남편과의 시간.
늘 갈증 나듯 하던 일상들.
그러다 갖게 된 첫 아이의 임신과 출산, 아기를 안았을 때 비로소 샘이 터지듯 갈증이 사라지고 찾아온 평화와 안정.
아이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올라 남편의 부재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등...
이야기의 결을 따라오며 나는 새삼 엄마에게서 여리고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느꼈던 것이다.
엄마는 사춘기 시절이 없었나? 할 만큼 언제나 거칠고 투박하게만 여겨졌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도 여린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은 참 낯설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낯선 모습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것은 엄마 본래의 성품이 그다지 드세지는 않았을 거라는 안도에서였다.
나에겐 한 분의 외삼촌과 한 분의 이모가 있는데 이 분들의 성품은 그야말로 어질기가 부처님 같았다.
늘 온화한 미소로 우리 형제들을 반겨주며
어린 우리에게도 '너' 대신 '이 사람아'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이모를 보며 왜 우리 엄마는 이모 같지 않은지, 형제끼리 왜 이리 다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엄마도 원래는 이렇게 다정하고 겁도 많은 순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아프게 와서 박혔던 것이다.
순정... 그래, 열여덟 살 새 신부에게 순정이 있었어...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손을 흔드는 스물한 살 젊은 엄마에게도 순정이 있었어..
첫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엄마는 섬세하고 순진한 소녀에 가까웠고, 시간을 따라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스물한 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가 싫어서 글을 쓰겠다는 구실로 집을 나와 혼자 자취를 하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엄마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며 이상향을 찾아 헤매었건만, 집을 나와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던 나만의 공간에서도 나는 정작 외로움과 두려움에 밤마다 시달려야 했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가 쏟아질 것처럼 붉게 충혈되었고, 몇 날 며칠을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 비쩍 해진 나의 모습이 엄마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마치 위에서부터 강렬한 해가 비추는 듯이 음영이 확실한 한 몸처럼...
그때, 엄마도 나처럼 스무 살의 여린 소녀였다.
해피마망의 연작 소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