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엌으로 들어온 햇살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엄마는 진이를 낳은 지 삼년이 지나 장남을 낳았다.
"얼쑤! 경사 났네, 경사 났어어~
동네 사람들아~ 우리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네, 아들을 낳았어~~"
너무 기쁜 나머지 할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마당에서 춤을 추었다.
그때부터 집안의 공기는 조금씩 바뀌고 엄마는 집안에서 큰소리를 칠 때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들이 귀한 집에서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세를 부리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는 귀한 맏손자에게 '밝고 기쁘게 살라'는 의미로 철이(哲怡)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 아들과 세 살 터울로 1957년 구월에 내가 태어났다.
역시 할아버지는 내게 '착하게 살라'라고 선이(善怡)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연도와 달을 세어보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그 사이의 밤과 낮은 엄마의 몸과 마음을 몇 번이나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젖을 물리고 재우고, 방바닥을 쓸고, 장독대의 뚜껑을 들추어 보고.
이제 막 혼자서 이집저집 돌아다니던 일곱살 계집아이와 엄마 손을 유난히도 타던 네 살 사내아이를 건사하며, 또 갓난아이를 업고 다녀야 했던 스물여섯 살의 엄마는 점점 지쳐갔고 남편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해가 한번 더 바뀌고, 벚꽃이 동네를 환히 밝히던 때.
4월에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때의 나는 겨우 돌이 되기 전의 아기였지만, 엄마는 벌써 1남 2녀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서, 벌써 종로에 있는 큰고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해 두었다.
이사하는 날 엄마는 당장 입을 옷가지와 부엌살림만 몇 가지 챙겼다. 어차피 시골 살림이라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세간살이등은 새로 장만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 집은 효자동에 있었다.
집에서 보면 작은 마당이 있고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이는 동네였다.
골목길을 두고 양쪽으로 기와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동네인데 어릴 때는 그 골목길이 너무 길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집은 겉으로는 기와집으로 시골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조였지만 부엌만큼은 신식으로 되어있어서 엄마는 서서도 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그 집을 우리 집으로 만드는 속도가 빨랐다.
서쪽을 향해 들어 선 부엌은 오후가 되면 해가 길게 들어왔고, 엄마는 늦게까지 해가 들어오는 부뚜막에 앉아있곤 했다.
오후 햇살이 부엌을 비추던 날, 엄마는 작은 유리병 하나를 씻어 창틀 위에 올려두었다. 투명한 병 속에 햇빛이 머무는 걸 보고 기지개를 켜듯 두 손을 뻗으며 불현듯 말했다.
" 이제 우리 집 같지?"
엄마는 두 팔을 내리더니 길게 앉혀진 찬장을 몇 번이고 윤이 나도록 닦았다. 부엌의 낯선 냄새를 지우고 새 삶의 냄새를 들이려는 것처럼.
엄마는 일거리를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하면서 우리를 다그칠 때도 많았는데, 그런 엄마의 바지런함 덕분에 집안은 하루가 다르게 반짝였다. 마치 엄마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듯이.
저녁이면 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어떤 날은 명동에서 전기구이 통닭을 사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부채과자나 깡통에 든 미제사탕을 사 오기도 했다.
마루로 올라서며 아버지는 제일 먼저 진이를 안고는 그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 언니는 까르르르 온몸을 비틀면서 웃었다.
네살 난 장남은 그런 아버지와 누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갖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를 슬그머니 손에서 놓곤 했다. 엄마는 그런 모양을 선채로 빙긋이 바라보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부엌에서 그릇 놓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저녁, 부엌의 불빛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나는 그 불빛 속에서 엄마의 등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아침이 되면 동네는 두부장사, 생선장사들의 소리로 분주했고 오후가 되면 떡장사가 집에 왔다. 엄마는 그렇게 오는 장사꾼들을 한 번도 그냥 보내는 적이 없어서 우리 집엔 두부나 생선, 떡 등의 먹을거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에구, 때가 지났는데 밥이라도 한 그릇 잡숫고 가셔~"
콩이 들어간 송편이며 시루떡등을 사면서 엄마는 종종 떡장사 아줌마에게 밥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어쩌다 시골에서 먹거리들이 올라오면 엄마는 그중에 가죽나물을 길게 부쳐서 온 동네잔치를 했다. 그런 날은 동네아이들이 가죽나물 부침개를 하나씩 들고 나와서 네 것이 길다, 내 것이 더 길다, 부침개 키재기를 하며 가죽나물 줄기를 죽죽 찢어 먹곤 했다. 고소한 기름냄새가 골목을 따라 퍼졌고, 엄마의 인심과 손끝의 온기가 동네를 데웠다.
내가 걸음을 걷기 시작하고 세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미장원이며 목욕탕을 갈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그 긴 시장길을 지나올 때 엄마는 꼭 엿을 사주곤 했다.
"목욕하느라 힘들었지? 엿 먹으면 힘이 날 거야."
땅콩이 송송 박혀있는 둥글고 큰 엿을 몇 장 사서는 한 장을 잘라 내 손에 쥐어주며 아직 물기가 묻어있는 내 머리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그때 엄마 손에서는 우유냄새 같은 비누향기가 풍겼다.
엄마는 마치 처음부터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서울살이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건, 엄마의 말에는 사투리가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사투리를 않썼는지 어쩐 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한 번도 엄마나 아버지가 사투리를 쓰는 걸 듣지 못했다.
엄마는 작은 화초를 하나 사서 남쪽으로 난 마루의 창틀에 올려놓기도 하고 작은 마당에는 화초들을 심고 가꾸기도 했다. 화장대 위에 작은 용기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새 옷을 사서 거울 앞에서 입어보기도 하면서 엄마의 얼굴은 점점 화사해졌다.
나는 엄마가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는 엄마 얼굴에서 오이향 같은 좋은 냄새가 나곤 했다.
엄마는 손재주도 좋아서 시장에서 사 온 옷이 마음에 안 들면 뜯어서 자기 마음에 맞게 고쳐 입기도 했는데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엄마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오래도록 옷태를 살폈다.
"엄마 이뻐?" 묻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르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 엄마는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다. 한번 출장을 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곤 했는데 우리는아버지가 출장 가는 걸 좋아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출장길에는 꼭 무언가를 한아름씩 사 왔다.
호두과자나 초콜릿 같은 과자도 있지만 인형이나 공책, 철이에게는 자동차 비행기 같은 장난감들을 잔뜩 사 와왔다.
그리곤 잠이 든 우리를 깨워서 선물들을 안겨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호두과자를 먹고, 장난감을 받아 들곤 그대로 잠에 골아떨어지곤 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신발가게에 가서는 고무장화를 보여주었다. 발목보다 조금 더 긴 장화를 꺼내서 내 발에 신겨주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내 발 앞에 앉아서 앞볼을 꾹꾹 눌러보면서 나를 쳐다보면, 나는 공연히,
"이건 싫어 커." 하며 다른 신발을 가리켰다.
여러번 장화를 신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나는 동네 애들이 신었던 화려한 색깔의 장화가 아니라 노란색의 커다란 꽃이 들어간 딱 맞는 장화를 골랐다.
"아휴~ 우리 딸이 아주 예쁜 걸로 골랐네, 아주 잘했어. 이걸로 신고 갈까?"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괜히 기분이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섯 살 때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다정했고 목소리는 조용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혼자 밥을 먹는데 그때도 꼭 우리를 불러서 고기나 생선등의 살점을 입안에 넣어주곤 했다.
때로는 엄마랑 손을 잡고, 나는 아버지에게 안기어 다섯 식구가 마을길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서늘한 밤기운에 아버지의 품이 유독 따뜻했다.
아버지의 머리에서는 포마드 냄새가 풍겼다.
생각해 보면 내 유년의 기억은, 부엌의 햇살과 엄마의 웃음, 그리고 아버지의 냄새로 빛났다.
그 빛이 사라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부엌의 유리병 속을 들여다본다.
햇살이 담겨있던 그 투명한 순간처럼.
엄마의 젊은 날도 그렇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