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더 바랄게 없다
"엄마 칠순에는 가족끼리 여행 갈까?"
일요일 나른한 오후에 작은딸이 옆에 앉아 느닷없이 묻는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그냥,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다.
어떤 날엔,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은 접시 하나를 설거지하고 들어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켠다.
그러면 혼잣말처럼 이런 소리가 툭 튀어 나온다.
"에구! 세상 더 바랄 게 없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앉아 있으면,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낀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 이제 내가 더 이상 '과업'으로 삼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아직 한 가지 남아있긴 하다.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남편이다.
나는 남편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길 바란다.
미워서가 아니다.
'혼자 남은 늙은 영감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삶이다. 너무 뻔히 보인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남편의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치는 게 내 마지막 과업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조차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닐테니 지금부터 전전긍긍하진 않으련다.
어쨌든 나는 지금의 날들이 참 좋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의무와 책임과 간섭에서 벗어난 거 같다.
부부간에도 서로 주장하지 않으니 마음을 상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생각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다.
아주 건강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번다.
무엇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사는 것도 애닯을 게 없다.
사는 것에 애틋하지 않으니 특별히 욕심을 낼 일도 없다.
욕심이 없으니 나와 세상에 대해서도 한층 너그러워질 수 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니 부정적인 것들이 눈에 안 걸린다.
눈에 걸리는 게 없으니 세상이 본디 모습대로 유쾌하다.
이거야말로 나이 듦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특권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
지금의 나는 전성기를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은 딸이 건넨 칠순 여행 이야기 덕에
문득,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 자신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래서 인생은, 살아봐야 아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