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 프레드릭 Jan 24. 2023

대미지(Damage)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랑, 그 광기 어린 애착의 시작과 끝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과 Notion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옮깁니다.


미친 사랑 이야기 1


이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제가 중학생 때입니다.

당시 학원 영어선생님이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것 같다'며 이 영화를 소개했어요.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도 했고요.

매우 수위가 높기 때문에 애들은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한참 후 성인이 되고 이 영화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얘기해 준 줄거리와 전체적으로는 맞았지만 세세하게는 달랐어요.

글쎄요. 저는 이 영화가 굳이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랑의 파국적 결말.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광기 또는 집착.

아픔을 가진 묘한 분위기의 한 존재가 여러 사람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잔혹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미친 사랑 이야기'의 첫 영화로 선택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다분히 막장입니다.

잘 나가는 정치인 스티븐 플레밍, 그리고 그의 아내 잉그리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들 마틴, 귀여운 딸 셀리. 남 부러울 게 없는 훌륭한 가족이죠.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은 마틴의 애인 안나를 만나 묘한 그녀의 매력에 깊숙하게 빠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랑은 파국을 맞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찰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나와 스티븐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은밀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둘의 섹스 장면이 매우 노골적이면서도 가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드는데요.

마치 '모범적이고 바른 삶'을 살아온 스티븐의 억눌렸던 욕망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인생에서 이 정도의 열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틴도 은연중에 얘기하듯이 그는 보통 '냉담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화살이 씌어도 제대로 씐 안나는 남성들에게 묘한 매력을 풍깁니다.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에게 남자들은 대부분 호감을 가지는 듯해요.

그런 그녀의 매력은 그녀에게 득일까요 독일까요.


안나는 스티븐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그의 아들인 마틴과의 관계도 이어갑니다.

스티븐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해주겠다고 하는 한편 '그냥 이대로 좋으니 바꾸려 하지 말라' 합니다.

제3자가 들으면 '뭐 이런 그지 같은 소리가?'싶지만 그녀에게 저 말을 들었다면 그냥 수긍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빛, 말투, 행동 모두 사람을 홀리죠. 그녀 같은 사람을 '팜므파탈'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치명적 매력... 이건 독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와 '뱀'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왜일까요. 

조용히 다가와서 상대의 몸을 휘감아 꼼짝 못 하게 만든 후 독으로 상대를 마비시켜 결국은 상대를 파국으로 내모는...


스티븐과 안나의 관계는 제 기준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잠깐 봤을 뿐인데 며칠 후 안나는 스티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장소를 얘기합니다.

스티븐은 그에 바로 응하고, 둘은 만나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몸을 섞습니다.

기승전결 없이 기-결만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훌륭한 연출 덕인지, 배우들의 열연 때문인지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영화니깐요... 영화에서도 ‘현실성’을 따지는 저이지만 이번엔 ‘미친 사랑’ 특집이니깐 둘의 관계를 '현실적인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화적인 마음'으로 감상해 보기로 합니다.


어렸을 적 오빠가 자신에게 집착하다가 죽은 기억을 가진 안나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소유욕'을 경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미친 스티븐에게는 오로지 안나만 보이고 안나만 들릴 뿐이죠.

스티븐은 회의 차 참석한 브뤼셀에서 12시간의 공백 시간이 생기자 안나를 만나기 위해 안나와  마틴이 머물고 있는 파리까지 갑니다.

[너를 갖고 싶어. 너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아

이 남자를 어쩜 좋습니까. 그는 지금 단단히 미쳤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어요.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이 아들의 애인과 대낮에 교회문에 기대 섹스를 하다니요.

평생을 살면서 이토록 강렬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그 또한 이런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받은 것 같습니다.


그는 안나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위해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그걸 말리는 건 오히려 안나죠.

이미 갖고 있는 걸 갖기 위해 이혼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흔들림 없이 말하는 안나에게 스티븐은 설득당한 것 같습니다.

역시 관계에 더 미쳐있는 사람이.. 약자입니다.

지금 그의 삶은 안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마치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요.

자신의 삶에서 안나를 잃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잉그리드의 생일을 맞아 방문한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마틴은 안나와 결혼하기로 했음을 모두에게 알립니다.

마틴은 '안나는 나와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돼요'라고 스티븐에게 얘기합니다.

스티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집니다.

나만의 안나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스티븐의 정신이 아득해졌을 것 같아요.

마틴과 안나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스티븐은 마침내 안나와의 관계를 끝내고자 합니다.

안나는 스티븐과 지낼 장소의 열쇠를 스티븐에게 보냅니다. 안나는 스티븐을 놓아주지 않네요. 

(이 부분은 강력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안나는 스티븐과 마틴 중 어느 누군들 진정으로 사랑했었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의 오빠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닐까요?

마틴과 자신의 오빠가 매우 닮았다고 하는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서 추측해 봅니다.

자신의 오빠가 자살한 것에 대한 충격으로 피터에게 자신을 '가지라'라고 하고,

자신의 오빠를 닮은 '마틴'과 결혼하려고 하며, 누군가 자신을 '소유'하는 건 싫지만 자신은 스티븐, 마틴 모두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오가며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험하다'라고 안나가 얘기했었어요. 이건 경고예요.

결국 파국을 맞은 안나와 그의 관계, 그리고 아들과 가족들과의 관계.


그는 자신 말고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사건 후에도 꽤 담담합니다.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아요.

한 순간 위험하게 불타올랐던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끝나고 자신의 모든 것은 재가돼버렸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남아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화려하던 이전의 삶과는 상반되는 소박한 집에서 살아갑니다.

그의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마틴, 안나, 그가 함께 찍은 사진이죠.

모든 걸 잃었지만, 그래도 그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어요.

안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마틴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을 매일매일 저 사진을 보며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한 위안이자 벌.


거기에 아래와 같은 내레이션이 깔립니다.

[ 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세상에서 물러났다.

난 내 인생을 찾을 때까지 떠돌아다녔다.

인생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알지 못할 감정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나는 우연히 그녀를 한 번 볼 수 있었다.

공항에서였다. 그녀는 날 보지 못했다.

피터와 함께였다. 그녀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


그녀는 결국 전 남자친구였던 피터에게로 돌아갑니다.

마치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을 때 피터에게 가서 '나를 가져'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네요.

그녀가 마틴과 스티븐을 사랑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후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분리시키는 느낌도 들어요.

피터에게로 돌아간 그녀는 그의 아이도 낳은 듯합니다.

결국 그녀도 시간이 지나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자신에게 여신이었고 세상 어떤 것보다 고귀한 존재였던 안나도 결국은

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걸 스티븐은 마침내 깨달은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선생님이 말한 것과 달랐어요.

선생님은 스티븐의 집 벽에 '안나'의 사진이 걸려있다고 설명하셨고

'모든 것은 잃고 허름하게 살지만 그녀의 사진만큼은 한 벽만을 채울 정도로

크게 걸려있다'라고 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산다.. 이런 것으로 해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안나만 나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어쩌면 그에게 '안나'는 열정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미친 시절이었던 그때.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자신.

그 불타올랐던 시간을 추억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사랑은 그렇다고 하잖아요.

결국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기보다는

그 사랑에 빠졌던 그때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 거라고.

격정적 사랑, 블랙홀처럼 누군가에게 빠졌던 시간, 그리고 그 관계의 마지막을

감각적이고 파격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미친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신가요.


+ 이 영화는 노출 수위가 매우 높습니다. 남녀배우의 헤어누드 장면이 일부 있고요,

저는 모자이크 처리된 버전을 봤는데, 제레미 아이언스의 나체가 나옵니다. 

극 중 꼭 필요한 장면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배우라도 자신의 전라를 노출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 모두 매우 훌륭했어요. 제레미 아이언스는 어쩜 그렇게 멋있을까요.

이 배우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너무 매력적인 마스크예요.

우아함이 그냥 뚝뚝. 미중년의 표본입니다.


+ 줄리엣 비노쉬도 매우 좋아하는 프랑스 배우입니다.

프랑스 배우 중에 줄리엣 비노쉬, 이자벨 위페르를 참 좋아하는데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좋은 작품에 두루두루 출연합니다.

응원하는 배우고요, 웬만하면 믿고 봅니다.(가끔 예상이 빗나가기도 하지만..)

줄리엣 비노쉬 출연의 '퐁네프의 연인들'또한 제가 생각하는 '미친 사랑 이야기'중 하나예요.


+ 이 영화는 당시 선정성 논란 때문에 개봉이 2년이나 미뤄졌고,

일부 삭제된 후 1994년에 개봉되었습니다. 개봉을 위해 루이 말 감독이 내한까지 했었어요.

당시 한국은 그렇게 큰 영화시장도 아니었을 텐데... 한국까지 와서 이 영화의 개봉필요성에 대해 설득하였다니 재밌네요. 당시 기사가 남아 있어 첨부해 봅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831752](https://www.joongang.co.kr/article/2831752)


+ 이 영화를 생각하면 Schubert Piano trio No.2 in E-flat Major. Op.100.D.929:II. Andante con moto 이 떠올라요. 뭔가 비극적이면서도 음울한 느낌이 드는 곡인데요. 특히나 유럽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에요.

[Schubert Piano trio No.2 in E-flat Major. Op.100.D.929:II. Andante con moto](https://youtu.be/000tLGbhdjg)


+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나는 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한참 전, 고등학생 때 만화 좀 읽는다 하는 아이들이 읽던 만화 ‘월광천녀’.

저는 이 작품은 보지 않았지만 이 작가님(Reiko Shimizu)의 단행본 ‘[비밀](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71983)’을 읽었어요.

첫 번째 에피소드가 매우 강렬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 2055년 미국 대통령이 휴가 중 강도의 공격에 칼을 맞아 숨집니다.

   숨지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지갑에서 어떤 사진을 한 장 꺼내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찢어버린 사진, 그리고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밝히기 위해

   수사팀은 대통령의 뇌를 MRI스캐너를 이용해서 스크린으로 쏘기로 합니다.

   영상에 오디오는 제공되지 않아 독심술사까지 대통령의 생전의 기록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청렴 결백하고 정의로운 대통령인 존 B 리드의 대부분 생전 영상은 듣던 대로 청렴하고 바릅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매우 강렬하게 인식된 사람이 있었으니... 딸의 약혼자 마슈.

   

   52번째 생일 연회에서 딸에게 약혼자를 소개받은 순간부터

   대통령의 시선은 한참이나 마슈를 향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실재보다도 잘생기게 전시가 되고(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실재 모습보다 잘 생기게 기억될 수 있기에) 파티 내내 대통령의 시선은 그의 모습을 계속 좇습니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감정을 담아 바라본 장면. 마슈의 모습입니다.

   대통령은 그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존경받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딸의 약혼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진을 지갑 속에 간직하고 다니다가, 죽음의 순간에서야 그 사진을 찢어 없애버립니다.

   하지만 결국 과학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세상에 드러나고 맙니다.    

   전개가 대미지와 꽤 비슷한 것 같아서 항상 이 만화가 생각이 나요.

   

   한 순간에 어떤 존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

   그 존재에게 계속 눈길이 가고, 그 모습이 내 뇌 속에 기억되는 것

   대통령의 마지막 시선들이 좀 애처롭게 느껴졌어요.

   내가 죽고 난 후 내 뇌를 스캐닝하면 어떤 이미지들을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하네요.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만은 온전히 나의 자유롭고 은밀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블라인드(Blin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