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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 프레드릭 Jan 24. 2023

블라인드(Blind)

날카롭고 뾰족한 잔혹동화 같은 사랑이야기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과 Notion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옮깁니다.


북유럽 영화 6


"그럼 시작해 볼까요?

동화가 끝나갈 즈음엔

분명 많은 걸 알게 될 거예요."


세상의 빛을 잃고 세상을 거부한 소년 루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여인 마리.

둘은 '눈의 여왕'이야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시각을 잃은 소년 루벤은 한 마리의 야수처럼 세상 모든 것을 거부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부잣집 아들이라 그의 어머니는 루벤을 위해 여러 사람을 고용했고,

마침내 루벤은 자신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고용된 마리를 만나게 됩니다.

마리는 거칠고 짓궂은 루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루벤을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루벤을 찾아오고 변함없이 책을 읽어줍니다.


'이 사람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껴서였을까요.

루벤은 이미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서로 같은 결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통했던 건지 루벤은 결국 마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루벤은 더 이상 빛에서 도망치지 않아요. 

자신의 마음에 따듯한 사랑이 찾아오듯 햇볕아래 온전히 몸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마리도 더 이상 루벤이 자신의 얼굴에 손을 못 대게 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던 것에 나를 허락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럼으로써 세상에 조금 더 나아갈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마리의 얼굴을 더듬으며 상처를 '얼음 꽃'이라고 하는 장면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릴 적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마리는 학대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사랑'을 허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루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둘은 열렬하게 사랑합니다.

마리는 처음으로 웃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사람처럼요.

둘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루벤의 눈을 고칠 수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서 마리는 불안해져 옵니다.

루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그건 그의 선택이죠'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두렵습니다.

둘은 커튼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루벤이 눈 수술을 받는 동안 마리는 루벤의 곁을 떠납니다.

눈을 뜬 루벤은 마리를 찾지만 마리는 그 자리에 없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보이는 세상'이 너무 낯섭니다.

어둠 속의 세계가 그에게는 더 익숙하기 때문이겠죠.

그가 눈을 뜨고 싶었던 이유는 '마리' 때문일 거예요.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던 마리.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마리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행복한 상상은 산산조각 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루벤과 마리는 재회하게 됩니다.

마리의 실물을 처음 보았을 때 흠칫 놀란 루벤, 그걸 통해 마리는 루벤과의 영원한 이별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결국 마리는 '동화는 믿지 않는다'며 루벤을 떠나고... 루벤은......

(그 후는 강력한 스포라서 얘기하지 않을게요.)


'보인다'는 것은 루벤에게 축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력을 되찾은 루벤은 마리의 모습을 본 후에도 마리에게 사랑을 약속하지만, 마리는 믿어주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어요.

참 아이러니 합니다.

자신의 사랑 하나를 위해 세상 모든 빛을 잃기로 결정한 루벤의 사랑은 광기에 가깝다고도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동화 같은 느낌입니다. 잔인한 동화.


마리 또한 다른 의미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눈의 여왕' 동화에서 처럼 '못나고 추한 모습만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났지만 못 본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고, 끝내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상처가 마리의 삶을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겪은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내가 나에게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쏘지만 않았더라도 이야기의 결말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음을 알기에 마리에 대한 원망의 시선은 거두겠습니다.


루벤또한 처음부터 마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사랑에 빠졌을까요?

이미 마리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서는 그에게 마리의 외모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외적인 부분'또한 사랑이 시작되는 데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죠.

저 또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마리의 선택이 이해가 갑니다.

제3자의 입장으로 봐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건 마리로서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영화 중반쯤 '동화는 어떻게 끝나냐'라고 하는 마리의 물음에 '해피엔딩이겠지'라고 루벤은 답합니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각자의 답변이 다를 것 같네요.

네덜란드가 배경인 영화지만, 시리도록 하얀 눈이 계속 나와서 마치 북유럽 영화 같은 느낌이 들어요.

(유럽 대륙의 끝에 있으니... 약간 북유럽이라고 보도록 할까요...?

또한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눈의 여왕'은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작품이기도 하니까)

영화의 배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보고 있으면 춥습니다.

여주인공 또한 백발에 가까운 금발이고 핏기 없는 얼굴로 등장해서

마치 '눈의 여왕'같은 느낌도 들어요.

이 작품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마치 카이는 루벤인 것 같고 게르다가 마리인 것 같아요.

'눈의 여왕'속 카이는 게르다의 순수하고 따뜻한 눈물로 자신의 심장과 눈에 박힌 거울유리조각이 씻어낼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카이와 게르다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가자고 반복했던 루벤, '동화는 믿지 않아'라고 말하며 동화 속 결말을 거부하는 듯한 마리.

루벤과 마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겨울이 가기 전 '눈의 여왕'도 읽어보고 싶네요.


+ 남주가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요? 연기도 너무 잘하고요. 짙은 흑발이 너무 잘 어울려요. 

요런 셀더슬라흐츠 Joren Seldeslachts라는 배우인데 인스타그램이 있어서 들어가 봤어요. 

이제는 어느덧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더군요. 

예전의 그 얼굴이 남아 있는데 역시 흑발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 이 영화를 보고 이 음악이 떠올랐습니다.

Kreisler: Praeludium and Allegro 바이올린 소리가 애절한데요.

봄,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1987년 녹음버전인데 너무 절절합니다.

[Kreisler: Praeludium and Allegro](https://youtu.be/DOPr_80EfUw)


+ 바이올린 곡 중에 또 가슴이 찢어지게 슬픈 곡으로는 Vitali Chaconne in G Minor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이 연주한 이 음악을 중학생 때 처음 들었는데요.

듣고 울었어요. 바이올린이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곡이에요

[Sarah Jang Vitali Chaconne in G Minor](https://youtu.be/Qh3fi66_fHo)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음악이 많습니다.


+ 아래는 영화 속에 등장한 '눈의 여왕'의 일부분입니다.

주로 마리가 루벤에게 읽어주는 장면으로 등장하죠.

절묘하게 영화의 줄거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고

못나고 추한 모습만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있었어요.

그때 사람은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죠.

이 지독함에 온몸을 떨며 웃음을 멈추지 않던 거울은

곧 수백만 개로 조각이 나

땅 위에 비처럼 내렸습니다.

거울 조각이 심장에 박히면 차갑게 얼어붙었죠.

어느 도시에 친남매는 아니지만, 서로를 아끼는 두 아이가 살았습니다.

남자아이는 카이, 여자아이는 게르다였죠.

어느 겨울에 눈이 내렸습니다.

'흰 벌들이 날아다니는 거란다' 할머니가 말했어요.

'여왕벌도 있나요?' 카이가 물었죠

'그럼' 할머니가 말했어요.

'눈의 여왕이란다. 늦게까지 이곳저곳 창문을 들여다보지.

그럼 창문이 얼어붙는단다. 얼음꽃처럼'

거울 조각에 눈을 찔린 카이에게는

모든 것이 흉측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말 못생긴 장미잖아? 아야!'

카이가 말했어요.

'심장이 찔린 것처럼 아파'

카이의 심장도 거울 조각에 찔렸어요.

심장은 점점 얼어붙었죠.

'왜 울어?' 게르다가 물었어요.

'정말 흉측하구나, 게르다'

...

여왕은 얼음으로 만들어졌지만

아름다웠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입술이 카이의 이마에 닿았습니다.

입맞춤은 카이의 얼어붙은 심장으로 스며들었죠.

꼭 죽어가는 것처럼요.

다시 한번 입을 맞추자 카이는 게르다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카이는 그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어요.

'영원'이라는 단어였죠.

'기억해 내면 놓아주마' 여왕이 말했어요.

...

얼음뿐인 궁전에서

카이는 얼어붙은 사람 같았습니다.

카이를 알아본 게르다는

그를 꼭 껴안았습니다.

게르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카이의 가슴으로 떨어졌고

심장을 녹였습니다

카이의 눈에 입을 맞추자

눈물이 흘렀습니다.

게르다가 손과 뺨에 입을 맞추자

카이가 얼굴을 붉혔습니다.

눈물이 거울 조각을 씻어내자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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