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시린 기묘한 사랑이야기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과 Notion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옮깁니다.
북유럽 영화 5
겨울 하면 항상 떠오르는 영화, 렛미인입니다.
13년 전 이 영화를 봤지만 다시 보니 너무 새롭습니다.
영화는 13년 전 그때 그대로겠지만 그걸 보는 저는 그때의 제가 아니기 때문이겠죠?
기억났던 건 마지막 즈음 수영장에서의 장면뿐입니다. 다시 보니까 더 좋아요.
쓸쓸하지만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제가 딱 좋아하는 느낌의 영화입니다.
보기만 해도 추운 눈 덮인 스웨덴의 겨울날, 외톨이 소년 오스칼은 이엘리를 만나게 됩니다.
외로웠던 오스칼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이엘리.
둘은 묘한 우정을 나누게 되다가 결국 '사귀게'됩니다.
사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요.
이엘리가 처음 등장할 때 함께 있던 나이 든 남자의 존재가 궁금했습니다.
누구길래 이엘리에게 피를 구해줄까. 그리고 둘의 대화에서 언뜻 '주종'의 역할도 느껴집니다.
이엘리는 남자를 타박하고(아마도 피를 구해오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는 이엘리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로 살인마는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어설픕니다.) 그 또한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었겠죠.
이엘리를 만나기 전 까지는.
어쩌면 오스칼과 같이 외로움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던 평범한 소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미국판 렛미인에서 친절하지만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는 12살 되던 해 즈음 이엘리와 만났을 거예요. 오스칼도 이엘리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다간 그 남자처럼 이엘리에게 평생 피를 갖다 받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엘리는 얼마나 살아온 걸까요. 그 남자가 이엘리에게 첫 번째 남자일까요?
영원을 살아간다는 건 정말 끔찍한 것 같습니다. 영화 맨 프롬어스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구병모 작가의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한번이라도 내가 되어봐'라고 얘기합니다.
본인도 그만큼 고달프다는 거겠죠. 잠깐이지만 주름진 이엘리의 모습이 나와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몇 백 년 또는 몇 천 년을 살아왔을지 모르는 이엘리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짠하기도 하고요.
나이 든 남자를 안쓰럽게 쓰다듬는 모습이나, 오스칼에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을 봤을 때, 이엘리 또한 ‘경계’에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완전히 냉혈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도 없는 기구한 운명.
늙은 남자는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기 전 이엘리에게 말합니다. '오늘 밤엔 그 애 만나지 말아 줘'라고요.
자신의 마지막을 알았던 걸까요.
아무리 백발의 노인이 됐다고 하더라도 평생 이엘리를 위해 살아온 자신의 삶을 조금은 보상받고 싶었던 걸까요.
그녀를 끝끝내 너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연도 궁금해집니다. 그의 쓸쓸한 표정이 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염산을 자신의 얼굴에 부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읇조렸던 이름 '이엘리' 그에게 과연 '이엘리'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평생을 다해서 한 존재 만을 위하고, 바라고 원한 적이 있으시다면 아마 공감이 갈 것 같네요.
그리고 왜 이엘리는 오스칼의 집에 들어갈 때, 늙은 남자의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도 돼?'라고 묻고 허락을 받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이 부분은 여전히 저에게 의문이에요.
뱀파이어들에게 그런 규칙이 있나요? 뱀파이어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저로서는 짐작이 안 되는 부분이에요. 뱀파이어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였을까요. 뭔가 추측되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나눠주세요.
이엘리는 오스칼을 떠나기로 합니다.
결국 오스칼과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알기 때문에 떠나는 것 같아요.
이엘리는 뱀파이어기 때문에 사람의 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스칼과 함께하다가는 오스칼의 피까지 마시게 될 거예요.
이엘리 옆에 있던 남자도 결국 이엘리에게 피를 주게 되듯이 오스칼도 결국 피를 주겠죠.
이엘리는 그 피를 달게 마셨을 까요.
저는 '뱀파이어'소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인 소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합니다.
영화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 음악 등의 총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영화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로 저를 압도했습니다.
논할 거리가 많은 영화는 아니지요.
뱀파이어의 기묘한 사랑(?)에 대해서 제가 뭐 별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냥 그 묘한 분위기.. 추운데 더 춥게 느껴지는 스웨덴의 눈 오는 겨울 풍경.
거기에 참으로 외로워 보이는 소년, 그 소년 옆에 있는 뱀파이어. 그리고 우정인지 사랑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를 끝까지 그를 지켜주는 그녀의 모습.
이 모든 게 얽히고설켜 그냥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겨울을 좋아하지 않고, 겨울에는 가벼운 우울증을 앓을 정도로 기분이 많이 저하됩니다.
내가 가장 움츠러들 때 이런 영화를 보게 됩니다.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음에 겨울이 고마워지기도 하니깐요.
겨울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정서죠. 춥고 힘든 겨울을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견뎌내야겠습니다.
때로는 너무 차가운 것은 그 보다 더 차가운 것을 만나 따뜻해지기도 하니깐요.
+ 2008년에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2년 후 미국에서 리메이크가 되었어요.
클레이 모레츠가 주연을 맡았고, 둘 다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물을 건너서 일까요.
확실히 미국판은 미국 느낌이 많이 났습니다.
조금 더 친절한 설명(스티커 사진), 그리고 난데없는 경찰의 등장.(매우 미국 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 또한) 원작을 보지 않고 봤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 마음속에 이미 '렛미인' 하면 '스웨덴'판이 떠오릅니다.
전체적인 틀은 비슷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에서 두 나라가 많이 다름을 느낍니다.
두 영화 모두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르겠죠.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합니다.
+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경계선'과 같은 작가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작가인데요, 소설은 아직 저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추운 겨울이 가기 전에 읽어 봐야겠습니다. 아니면 무더운 여름에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아요. (1,2권으로 나눠져 있어서... 읽으려면 꽤 큰 결심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소설이든 영화든 1편을 넘어 2편으로 가는 순간 흥미를 확 잃어버려서요.)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