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분노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과 Notion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옮깁니다.
북유럽 영화 4
한동안 추운 배경의 영화를 소개했으니 오늘은 조금은 따뜻한(?) 배경의 덴마크, 스웨덴 영화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는 대체로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잘 만든' 영화를 좋아합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영화 말이죠. (올드보이, 타인의 삶, 씨민과나대르의 별거 등)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모든 씬이 잘 연결되어 있어 '잘 만든 느낌'이 드는 영화예요.
영화가 주는 메시지도 좋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보게 되는 영화기도 하고요.
여기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안톤)의 외도로 상처받은 마리안느, 사랑하는 아내와의 신뢰를 깨트려버리고 (아마 그 죄책감으로?)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떠난 안톤.
부모님의 이혼과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의 아들 엘리아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 실의에 잠긴 (게다가 아들까지 말썽인) 클라우스.
엄마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세상에 등을 돌려버린 크리스티앙.
그리고 그들은 갈등을 겪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폭력적인 세상과 마주합니다.
폭력과 분노 앞에서 그들은, 그리고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영화는 안톤이 의료봉사를 하는 아프리카의 이야기와
엘리아스, 크리스티앙이 주축이 되는 덴마크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줍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북유럽 어딘가의 모습과 더운 지방의 생사를 다투는 현장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건의 배경 지역과 등장하는 대상이 달랐다 뿐이지 감독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분노, 선택, 그리고 용서.
영화를 보면서 계속 떠올랐던 단어예요. 영화는 저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묻는 것 같아요.
길 잃은 분노는 나에게, 세상에 도움 되는 감정이 아닙니다.
세상에 너무 미친놈들이 많기 때문에 일일이 그들에게 분노하거나 그들을 증오하면서 살기에는 내 삶이 너무 피폐해지죠.
하지만 어떤 '선택'을 통해,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대상'을 용서할 것인가는 생각해 봐야 하갈 문제 같습니다.
때로는 '정확한 대상'에 대한 '합당한 분노'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사건의 발단은 아프리카 의료봉사에서 돌아온(휴가차 온 것 같아요) 안톤이 아들들(엘리아스, 몰텐), 크리스티앙과 해변가에 놀러 갔다가 둘째 아들 몰텐과 다른 꼬마의 싸움을 말리면서 시작됩니다.
꼬마의 아빠는 랄스라고 하는 사람이고, 랄스는 언어적 폭력, 신체적 폭력이 생활화되어 있는 멍청입니다.
안톤은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에게 뺨을 맞습니다.
아이들은 여기에 놀라고, 엘리아스 조차 안톤에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겁나는 거냐'라고 합니다.
안톤은 엘리아스에게 '폭력에 대항해서 폭력을 쓰면 나도 똑같이 바보가 되는 거다.'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엘리아스는 여전히 그런 아빠의 뜻을 완전히 이해지 못한 듯해 보입니다.
안톤은 며칠 뒤 아이들과 함께 랄스를 찾아가서 '왜 나를 그때 때렸느냐'라고 묻다가
랄스한테 더 맞습니다.(ㅠㅠ)
아이들에게 자신은 '저 멍청이에게 맞는 게 두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걸 설명하려 한 것 같은데
그 방식이 아이들에게 너무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야 맞죠.
하지만 아빠가 우락부락한 사람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안톤이 의도한 바 대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라도 힘들 것 같아요.
또한, 과연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엘리아스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괴롭힘은 계속 됐어요.
하지만 크리스티앙이 엘리아스를 괴롭히던 소푸스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칼로 위협하고 나니 소푸스와 그 일당들은 더 이상 엘리아스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엘리아스는 뭘 느꼈을까요.
이 사건에서 저는 안톤이 '이상주의자'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안톤은 분명 좋은 사람이에요. 바른 사람이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비록 외도로 인해 마리안느의 신뢰를 저버렸지만 여전히 너무 다정한 아빠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지키느라 아프리카 반군지도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고 그를 치료해 줍니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폭력으로 갚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어이 랄스를 찾아가
자신이 직접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너무 '이상 적여서' 오히려 반감이 드는 부분입니다.
안톤 또한 고민을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성'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의사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니깐요.
하지만 마침내 '빅맨(아프리카 반군 지도자)'이 자신이 가해한 여성에 대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모습을 보고 폭발해 버립니다.
그리고 굶주린 생선 때에게 먹이를 던져 주듯 그를 화가 난 군중 속에 던져버립니다.
사실 그때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용서'라는 감정은 매우 존귀하고 숭고합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용서'는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절하게 표출했어야 하는 '분노'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터져 나왔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의 이야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앙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티앙은 엄마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세상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눈에서 살기가 흐르더라고요. (연기를 매우 잘했어요)
크리스티앙은 분노에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 엘리아스는 천성이 착한 아이라 분노를 누군가에게 강하게 품기보다는 삭히는 편이죠.
엘리아스는 크리스티앙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크리스티앙 덕에 더 이상 친구들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고,
유일하게 자신의 친구가 되어준 크리스티앙을 잃고 싶지 않았겠죠.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분노'를 터뜨릴 곳을 찾게 되고 결국 엘리아스의 아빠를 때린 랄스의 차에
폭탄을 설치하기로 합니다.
고작 10살 정도의 아이가 하기엔 정말 무서운 일이죠.
이 과정에서 엘리아스가 다치게 되고, 이로 인해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분노'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가까운 친구를 다치게 했고, 이 일로 크리스티앙도 충격이 컸을 거라고 생각해요.
크리스티앙이 분노로 똘똘 뭉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잖아요.
친구가 자기 때문에 죽은 줄 알고 자신도 세상과 작별하려고 하다가 결국 안톤에게 구조되고,
아빠를 만나 그동안의 분노를 울음으로 터뜨리게 됩니다.
크리스티앙은 엄마를 잃은 슬픔을 '분노'로 분출시켰던 것 같아요.
'복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 '복수'가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 자신은 알지 못했죠.
애초부터 '복수'의 대상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상처받은 한 아이에 불과했어요.
다행히 크리스티앙은 이제야 엄마를 잃은 슬픔을 애도하게 될 것 같아요.
결국 얽히고설켰던 관계들은 대부분 좋게 풀어지고, 갈등도 해결이 되고, 분노도 누그러들게 됩니다.
결론은 간단하지만 그 과정까지 많은 일이 있었죠.
예전의 저는 '분노' '화'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의 평안을 위해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큰 변함은 없어요.
하지만, 분노해야 할 대상에겐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목수정 씨는 '아무도 무릎 꿇지 않는 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세상의 모든 분노는 정당하다.
그것이 분노라 불린다면,
짜증도 화풀이도 아니고 분노라면, 그것은 표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노를 표출할 때 그 방향은 정확해야 한다.
엉뚱한 사람에게로 향한 분노의 화살은 피해자인 서로를 괴롭히고,
우리를 결코 분노에서 헤어날 수 없게 만든다. ]
'분노'에 대해 가장 명쾌하게 얘기한 글이 아닐까 싶어요.
폭력과 분노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어요. (단호하게!)
그렇다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 또한 옳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안톤처럼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평화적인 것'인 양 보여주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은 그 자체로 너무 자극적이고 보는 사람에게 충격이니깐요.
폭력에는 적절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떤 게 좋은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게 좋은 건지. 그냥 피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 영화는 어쩌면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가 '분노'를 표출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게 옳다고 말하지 않은 채로요.
분명 좋아하는 영화인데, 글로 제 의견을 말하는 건 항상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같이 공감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기쁠 것 같아요.
+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소개했던 사랑의 시대에서 부부로 나왔던 에릭(율리히 톰센 Ulrich Thomsen)과 안나(트린 디어홈 Trine Dyrholm)가
이번에는 학부형으로 만났습니다. 약 6년 후 영화에서 부부로 나오게 될 줄 그들은 알았을까요?
+ 크리스티앙 역은 윌리엄 요크 닐센 William Johnk Nielsen이라고 하는 배우가 맡았는데 1997년 생이네요. 마스크가 참 좋은데 그 후에 영화 몇 편 출연하고 그 후로는 활동소식을 알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엘리아스역을 맡은 마르쿠스 리가르드 Markus Rygaard도 마스크가 참 좋은데 연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나 봐요. 최근 작은 없네요.
+ 이 영화의 감독인 수잔비에르 감독은 이제 너무나 유명한 감독이 되었습니다. 버드박스라는 넷플릭스 영화로 완전히 궤도에 오른 것 같고요, 그전에도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의 원안인 '애프터 웨딩(2006)'의 감독을 맡았어요. (매즈 미켈슨이 주연이에요. 개인적으로 할리우드 버전보다 더 좋았습니다.) 그전에도 할리웃과 덴마크를 오가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고, 안 좋은 평을 받은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라는 작품에서도 '트린 디어홈'과 같이 작업을 했는데 이 영화도 보고 싶어서 찜해두었습니다.
+ 위 글에서 잠시 언급한 '[아무도 무릎 꿇지 않는 밤](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54811)'이란 책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위에 인용한 글은 다국적 택배회사의 횡포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나온 글입니다.
대기업들은 대게 자신들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제 본 영화 '카트'도 비슷하네요. 마트 계산원들과 마트 관리직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죠. 그들은 서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인데 말이죠. 참 잔인한 방식 같습니다.)
시스템은 개선하지 않고 피해를 보는 두 당사자들을 싸우게 한 뒤 자신들은 책임을 회피하죠.
사회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층간소음'문제도 비슷하다고 봐요.
애초부터 건축 시 층과 층 사이에 충분한 장치를 마련하여 아랫집 윗집이 소음에서 자유롭도록 했어야 하는데 비용 절감을 위해 이것들을 지키지 않아요.
그 피해를 아랫집 윗집 사람들이 고스란히 지게 함으로써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죠.
매너 문제도 분명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분쟁을 하려거든 아랫집 윗집이 힘을 모아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방향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전에는 이런 시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