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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 프레드릭 Jan 23. 2023

사랑의 시대(The Commune)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과 Notion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옮깁니다.


북유럽 영화 3


영화를 본 그날의 분위기가 유독 오래 기억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시대가 저에게는 그래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주저리주저리 풀어보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이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어요.

한때는 꽤 강렬하게 있었고 지금도 좀 더 나이가 들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기를 바랍니다.

주인공들도 그런 마음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크고 멋진 집을 상속받게 된 에릭과 안나 부부는 이 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합니다.

에릭은 처음부터 공동체 생활을 딱히 반기지는 않아요.

하지만 개방적인 안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항상 얘기했잖아. 새로운 얘기가 없잖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도 들어야지. 안 그럼 미칠 거야. 이 크고 멋진 집은 멋진 사람들로 가득 차야 해"라고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합니다.

마지못해 에릭도 이에 따르게 되고 결국 안나가 이전부터 같이 살고자 했던 친구들 (올레, 모나, 스테판 등) 그리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알론)도 한집에 같이 살게 됩니다.

재밌는 사람들로 매일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일상이 이어지지만, 에릭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부부간의 대화도 힘들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연인인 '엠마'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집니다.


에릭과 엠마의 관계를 에릭과 안나의 딸 프레야가 알게 되고, 에릭은 이를 안나에게 고백합니다.

이 상황에서 분노로 가득 차 다 뒤집어엎고 엠마의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야 할 안나는(제 정서는 그 정도입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엠마도 같이 집에서 살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기묘한 10명의 남녀의 동거가 시작되죠.


유쾌할 거라고 생각했던 실험은 예상과는 다르게 안나를 극도로 피폐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개방적인 서양 사람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남편이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이 난 것도 모자라

집에 들어와 같이 살고, 밤마다 둘이 사랑을 나눈다면 견디기 힘들 겁니다.

저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죠.

사랑에 빠진 에릭과 달리 안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더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안나와 에릭은 꽤 사이좋은 부부였거든요.

또한 안나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가장 잘 알고 자신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절정에 다다르게 하는 에릭의 몸을 잊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하는 사랑은 몸에 새겨져 잊히기가 쉽지 않죠.


결국 안나는 자신이 원하던 공동체 생활을 끝까지 지키지 못합니다.

"그이에겐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자기감정을 따를 권리" 안나가 엠마에게 한 말이에요. 말은 맞죠.

안나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유, 공동체, 내 연인의 연인까지 받아들이는 쿨한 관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고 봐요.

에릭에게 자신의 감정을 따를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결혼한 남자로서 가정을 지키고 아내와 자녀에게 충실할 의무도 있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안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했다면 그 안에서 나름대로 서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싫으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요.

자신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공동체 생활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습니다.


결국 깊은 불안과 우울을 삼키지 못해

수년간 해오던 방송국 엥커일에서도 사직을 권고받고 안나는 폭발 합니다.

울부짖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처지, 그리고 에릭,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제안했던 자신에 대한 울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고 에릭이 말하던 걸 안나도 똑같이 반복합니다.

에릭의 모습이 결국 시차를 두고 안나에게서 똑같이 발견되는 모습이에요.


이벤트와 술과 웃음이 넘치던 공동체 생활에 침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누가 이 공동체를 떠나야 하냐는 질문에 프레야는 '엄마'가 떠나야 한다고 하고, 안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만 결국 공동체를 떠나기로 합니다.

자신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된 공동체 생활을 그녀가 떠나야 하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극 중 에릭과 안나의 딸 프레야의 연애이야기도 흥미로운데요.

어떤 의도로 감독이 넣은 걸까 하는 궁금증도 들어요.

프레야는 말수가 적고 가끔 싱긋 웃는 표정을 짓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진 소녀인데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결국 그 남자(피터)에게 찾아가 먼저 키스를 하고 잠자리까지 가지게 돼요.

(14살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극 중에서 꽤 '안정적인 사랑'을 하는 편입니다.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깨어지고, 엄마가 결국 공동체를 떠나게 된 상황에서,

프레야는 피터를 찾아가 '사랑해'라고 말하죠. 이건 어떤 의미일까요.

저로서는 '사랑의 시대'가 '더 헌트'보다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나는 끝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누가 봐도 끝이 안 좋을 게 뻔한데... 왜 남편의 애인까지 같이 살자고 한 걸까.

라는 질문들을 계속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쯤으로 보입니다.

한참 자유가 중요시 여겨지던 시기였고,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많았던 시기라고 알고 있어요. (극 중 모나는 자유롭게 여러 상대들과 섹스를 하는 사람으로 나오기도 하지요.)

그 '시대상'에 안나가 젖어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영화를 기획했다고 해요.

“내가 경험했던,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70년대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그 당시 폐업한 레스토랑을 어렵게 찾았고, 그곳에서 실제로 술도 마셔보며 촬영을 했다”

감독은 어떤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을까요?


저는 이제는 여러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공동체 생활에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가능할 수는 있어도 영화에서 처럼 '삶'이 섞이는 공동체 생활은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개인의 공간이 확보된 상태에서 일정시간을 나누는 건 모르겠지만 자신들을 '새로운 가족'이라 칭하며 필요이상으로 친밀한 관계를 기본값으로 설정해 놓는 건 어딘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은 항상 '현재'의 것을 넘어선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 하지만 새로운 게 항상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바쁘고 지치는 생활 후 고요히 쉴 수 있는 '새롭지 않은 나의 공간'이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 때 단란했던 가족 구성원이었던 에릭, 안나, 프레야가 영화의 막판쯤 큰 식탁에 듬성듬성 앉아서 어색해하는 모습이 영화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가족이 최고! 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이상적인'공동체, '합일되는 관계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매우 이상 적여 보이는 것이 실재로는 이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고요.


+ 저는 '영화 보는 행위' 자체도 좋아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매우 설렙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그전 날, 전 주부터 설레요.)

그래서 종로의 뒤편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에무시네마를 좋아하고요.

가는 길에 카페 커피투어에서 라떼 한잔은 필수죠. (이 맛에 가기도 하는 듯)

예전에는 이화여대 안에 있는 아트하우스모모를 매우 좋아해서 자주 갔어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관객큐레이터 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가는 길에 좋아하는 카페가 있어서 커피 마실 생각에 두근두근하면서 갔었는데

그 카페가 없어지고는 모모에는 요즘 잘 안 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를 본 그날의 분위기도 잘 기억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사랑의 시대'는 영화를 본 '그날의 느낌'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 2017년에 만났던 남자친구와 두 번째 만난 날 본 영화였어요.

개봉하고 얼마 되지 않아 메가박스 코엑스 필름 소사이어티 관에서 봤습니다.

그가 코엑스 입구 기둥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 표정, 입었던 옷들까지 기억해요.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 병따개를 받았는데요.

그와의 아픈 이별로 인해 한동안 병따개를 숨겨놨어요.

병따개를 보면 그날의 좋았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니깐요. 그날부터 사귀게 됐거든요.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저 병따개를 아주 잘 쓰고 있고,

영화를 다시 똑바로 마주하게 될 수 있어서 이런 글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TMI겠지만 그래도 이 글을 저의 자기 고백 같은 글이기도 하니 주저리주저리 써봤습니다.


+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더 헌트' 중 크리스마스이브 예배에 아동들이 찬송가를 부르는데요. '사랑의 시대'에서도 똑같은 노래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동들이 교회에서 부릅니다. '할렐루야'가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 찬송가 같은데 이 음악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없지만 이 음악을 들으니 신성한 기분이 들어요. 덴마크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주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하고요.


+ 이 영화는 헤어누드를 포함하고 있어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하지만 너무 일상적인 느낌이라 야하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덴마크에서는 친한 사람들끼리 옷을 벗고 강이나 바다에 뛰어드는 전통이 있을까요? 묘하게 더 헌트, 사랑의 시대에서 비슷한 장면이 겹쳐져서 재밌었습니다.


+ 토마스 감독의 영화 더 헌트 - 사랑의 시대 - 최근 개봉한 어나더 라운드까지 보고 나니 감독이 좋아하는 색감과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따스함. 춥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 감독이 표현하는 이미지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북유럽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들어요.


+ 트린 디어홈 Trine Dyrholm이라는 배우는 '인어 베러월드'라는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연기가 매우 인상 적였어요. '인어 베러 월드'도 매우 감탄하면서 본 영환데요, 이 영화를 통해 수잔 비에르 감독을 알게 됐어요. 2011년 인어베러월드 이후로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죠. 어쩌다 보니 덴마크 배우, 덴마크 감독에 대한 글이 많네요. 특별히 애정을 가진 건 아닌데... 그나마 북유럽 영화 중에는 덴마크 배우와 감독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 걸까요? 혹시 다른 북유럽 영화들 추천해 주시면 챙겨 볼게요.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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