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영혼들이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주는 곳
1월 두 번째 영화, 절망 또는 희망 2
어느 날 내가 살았던 집과 동네가 없어진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집은 단순히 내가 '사는 곳(house)'를 넘어서 나의 '보금자리(home)' 같은 곳이죠.
긴 하루의 끝에 내 몸이 쉴 수 있는 곳. 그곳이 저에게는 '집'입니다.
영화 소공녀에서 주인공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도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었지만 저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살던 동네도 나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곳이에요.
오랜 시간 살던 동네에는 친구들이 있고, 가족이 있고 내 지난날들도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석고보드 수요가 감소하며 생산 회사가 지점을 폐쇄하였고, 한때 석고보드 생산으로 성황을 이루던 마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지역 우편번호까지 사라지게 되었어요.
주인공 펀은 남편이 죽고, 살던 마을도 사라지게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벤에 싣고 여행을 떠납니다.
노마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펀은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국립공원 등에서 임시직, 계절성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화 중에 펀과 가까워지는 데이브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펀처럼 노마드 생활을 하고 있고, 펀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펀은 데이브를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데이브의 손자가 태어나, 데이브는 노마드 생활을 잠시 접고 안락한 집에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펀에게도 여기서 같이 살자고 하죠.
데이브의 집에는 가족, 안정, 주황색 빛 거실, 와인잔이 부딪히는 저녁식사, 아이의 숨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밤, 자다가 깨어난 펀은 데이브와 그의 아들이 다정하게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도망치듯 자신의 벤으로 돌아와 추위에 떨며 잠을 청합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매우 강렬했습니다. 펀은 어떤 감정을 느꼈던 걸까요?
펀은 젊었을 적부터 자신의 자매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니고, 결혼 후에도 아이 없이 남편과 자유롭게 살았어요.
그런 그녀가 남편을 만난 후 정착한 곳이 '엠파이어'입니다.
남들과 다른 성향으로 외로움을 느꼈을 펀에게 어쩌면 남편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그곳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펀은 더욱 그곳에서 마음을 거두지 못했나 봅니다.
유일한 마음의 고향이던 곳이 사라지고, 그녀는 더 이상 어떤 곳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데이브의 집에서는 모든 게 너무 따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펀은 자신의 허름하고 추운 벤으로 도망쳤습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것이 '행복(안락, 따스함)'이지만 그녀에게 너무 멀리 있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그 온기에 손을 뻗을 수 없는 그녀의 상황과 감정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알지만 할 수 없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삶을 살며 떠돌아다니는 그녀의 삶이 남얘기 같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이 여행의 시작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었고, 직장과 집을 잃었습니다. 큰 상실을 겪었죠.
처음 노매드가 될 때 그녀는 집안의 물건들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집을 떠납니다.
하지만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조금씩 그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그녀는 이제 정말로 그 집을 보내주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상실과 그로 인한 절망으로 시작한 노마드 생활을 이제는 자기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다 그녀가 길 위에서 만난 노마드들 덕분이겠죠.
그녀가 만난 노마드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상실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길 위에서 살아갑니다. 다양한 삶의 선택지에서 그들은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죠.
자신들의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길을 나선 노마드들이 멋있어 보입니다.
그들은 다시 만날 기약 없이 서로를 떠나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없어도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이 영화를 보고(저 같은 경우는 책도 읽고) 그들이 처한 현실에,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도 머지않은 미래라는 생각에 꽤 암담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삶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분명 펀과 펀의 노마드 친구들의 삶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빡빡할 겁니다. 근데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이 의외로 밝아 보여서 일까요? 그들의 삶이 생각보다 비참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가진 것을 잃고 길 위를 떠돌아다니더라도 그곳에도 삶이 있음을,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어떤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고 앞으로의 날에 좋은 일이 별로 없을 것처럼 느껴져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선택에 의해 나아가는 삶은 모두 가치 있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사람은 잃은 대로,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대로...
인간의 희로애락이 당사자에게는 천년만년 같이 긴 세월 동안 일어나는 것이지만, 자연의 무한한 삶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한 것처럼 덧없고 하찮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 농사가 시작되고 사유재산이란 것이 생기며 계급이 발생한 이후로(지금은 계급이란 게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이 편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순수하고 철없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민들의 삶이 불행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듯, 세상이 우리의 편이 아니라도 우리가 불행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하찮음 속에서도 흔들리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쓸쓸하지만 아름답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영화는 노마드랜드(제시카 부르더 작)라는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저는 책도 읽었는데 책은 좀 더 미국 노마드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에서는 '펀의 삶'을 다소 감상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책은 좀 더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 사회 시스템에 경고를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책의 뒤 표지에 적혀 있는 말이 매우 강렬했습니다. "평생 쉼 없이 노동하는, 그러나 집 한 채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하여
그럼에도 꿋꿋이 희망을 그리는 이 시대 노마드들의 이야기"
+ 매달 주제를 정해서 거기에 맞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제 취향이 마이너 해서 주로 독립영화가 많습니다.
영화에 대한 리뷰 및 해석은 전적으로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다소 주절주절 할 수 있습니다.
+ 1월의 주제는 절망과 희망입니다. 이전에는 인스타그램(@yellow_mellow_page), 노션을 통해서 영화를 소개해 왔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스타그램을 참조해 주세요. (참고로 1월 첫 번째 영화는 '아이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