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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 프레드릭 Feb 19. 2023

수프와 이데올로기(Soup and Ideology)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에 이어 양영희 감독님의 가족사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수프와 이데올로기입니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 참여했을 때 상영작에서 이름은 봤는데, 그때는 다른 영화에 더 끌려서 보지 못했던 작품이에요. 

어떻게든 만나게 될 영화는 만나게 되나 봅니다.


이번에는 양영희 감독님의 어머니인 강정희 여사님이 주인공입니다. 

아버지 양공선 님에서 시작한 감독님의 가족 이야기는 감독님의 오빠, 그리고 조카 선화를 거쳐 어머니에게서 마무리됩니다. 


자식들에게 답답하리만치 헌신 적였던 어머니. 

아들 3명을 모두 북으로 보내고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들들, 며느리들, 손주들에게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까지 돈과 살림살이를 보내온 어머니를 감독님은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운 적이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80이 넘은 나이에 자신도 겨우 연금으로 살고 있는데 빚을 갚을 생각보다는 북한에 있는 오빠들에게 돈 보낼 생각만 하는 어머니가 감독님은 답답합니다. 


감독님은 감독님대로 오빠들이 빼앗긴 자유를 자신이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부모님에 대한 원망, 그리고 오빠들을 한평생 뒷바라지 하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합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부모님의 삶을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 또한 감독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감독 또한 자신의 삶을 조금은 희극처럼 보기 위해 약 30년 동안 가족의 삶을 찍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일본인 약혼자 아라이 카오루 님이에요. 


아라이 카오루 님과 감독님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감독님의 책 '카메라를 끄고 글을 씁니다'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부분도 재밌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게 대뜸 콘서트를 보러 가자니요?)

감독님의 배우자로 일본사람과 미국사람은 절대 안 된다던 부모님이셨지만, 

어머니는 딸이 50이 넘어서 데려온 일본인 파트너에게 정성스레 닭수프를 대접합니다. 

특별한 기교 없이 오로지 좋은 닭, 좋은 마늘, 정성으로 오랜 시간을 공들여 끓인 음식.

어머니가 만드는 닭수프는 당장 오늘 누군가가 찾아온다고 내어 줄 수 있는 음식은 아닙니다.

며칠 전부터 그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껏 준비해야 만들 수 있는 음식입니다.


식구란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맛있는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

어머니와 딸, 딸과 사위, 사위와 어머니의 생각은 모두 다를지라도 그들은 같이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닭수프 앞에서 그들은 북한지지자도, 아나키스트도, 일본인도 아닌 그냥 어머니, 딸, 사위입니다.


감독님의 어머니 강정희 여사는 제주도 4·3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4·3 사건으로 약혼자를 잃었고 자신의 가족들을 잃었으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일본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4·3은 공포 그 자체였으며 남한정부 또한 그녀에게는 4·3 사건과 동일어였습니다. 

4·3을 한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북한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감독님도 제주도에 방문하고 나서야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남한 정부가 제주에서 있었던 일을 인정하고, 피해자들도 자유롭게 4·3 사건을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 어머니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습니다. 어머니의 기억은 과거에서 멈춰버렸습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어쩜 이 가족을 이렇게도 관통하고 있는지... 기가 막힙니다.

감독님이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님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오빠들도, 조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감독님 또한 배우자가 생겼고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과거의 상처 속에서도 삶은 무심하게 계속된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들을 통해 감독님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감독님의 가족 이야기는 비극적인 한국역사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는 데서 매우 독특하지만 한편으로는 보편적입니다.

사건의 내용과 정도는 다를지라도 여느 가족들 또한 그 속에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져 어떨 때는 절대 합일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밥을 같이 먹어온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많은 밥을 같이 먹을 사람들입니다.


30년 동안 다큐를 찍어오면서 감독님이 이런 결말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몰랐던 이야기 점들이 모여 하나의 긴 선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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