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태어나던 날

by 아이만 셋

199*년 1월 1*일 밤 9시 14분

첫째가 태어난 날이다.

뱃속의 아기가 너무 커서 예정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의사는 유도 분만을 하자고 했다.

1*일 오전 9시,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가슴 콩닥거리며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나는 그 전날 오후 9시부터 금식을 했다.

병원에서는 끼니때마다 보호자를 위한 식사가 제공되었다.

남편은 테이블을 내 침대 쪽으로 끌고 와 내 옆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점심때 간호사가 문 쪽으로 테이블을 옮기고 식판을 올려놓고 나갔다.

남편은 또 테이블을 내 옆으로 옮겨서 밥을 먹었다.

저녁에 간호사가 다시 테이블을 입구 쪽에 옮기고 식판을 올려놓고 나갔다.

남편은 다시 내 옆으로 와서 먹었다.

간호사가 와서 남편을 혼냈다.

“와이프가 어제부터 금식하고 있는 것 모르세요? 왜 자꾸 옆에 붙어서 냄새 풍기며 밥을 먹고 난리예요?

내가 문 쪽에 테이블을 옮겨 놓은 이유를 좀 생각하라고요!!”

“Sorry!” 일어나 테이블을 옮긴다.

“Sorry는 니 와이프한테~~” 간호사는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윙크를 날리고 나갔다.

남편은 눈치가 없었다.

첫째가 태어나던 날은 몇십 년 만의 한파와 폭설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

차도 다닐 수 없었고, 구급 헬기도 뜰 수가 없었다. 의사도 발이 묶여 퇴근할 수 없었다.

의사는 밤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의사도 무료한 지 자정쯤 내 병실로 왔다.

남편과 의사 둘이 내 병실에서 맥주를 마셨다.

간호사가 와서 이번에는 의사를 나무랐다.

‘환자 쉬어야 한다’라고 둘을 복도로 내쫓았다.

간호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보며 또 웃었다. 새벽 3시쯤 의사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의사도, 남편도 눈치가 없었다.

분만을 위해 입원한 지 24시간이 지났다.

분만 촉진제를 맞아서 진통은 짧은 주기로 계속되는데 진전이 없었다.

여전히 아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제왕절개를 권유했다.

나는 ㅇㅇ엄마가 제왕절개 비용으로 만 달러도 넘게 지급했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었다.

내가 조금 아픔을 견디면 만불을 넘게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남들 다 자연분만하는데 나도 할 수 있어요. 자연분만으로 할게요.”하고 겁도 없이 말했다.

“우리 와이프 진짜 대단하다!” 하면서 남편도 거들었다.

“엄마가 되려면 이 정도쯤이야! 견뎌야지.”하면서 목에 힘을 주었다.

나는 병원비 때문이라는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What a brave woman!”이라고 하며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했다.

‘출산의 고통이 어떤 건지 네가 몰라도 뭘 한참을 모르네. 하기야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병원에 소문이 쫘악 퍼졌다.

‘그 쪼그만 동양 여자가 제왕절개 안 하고 자연분만한대. 너무 대단하지 않니?’

너무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기 안쓰러운지 남편이 그냥 수술하자고 했다.

“수술비가 얼만지 아나? ㅇㅇ엄마가 그러는데 만불도 넘게 든대.”

“진짜? 그럼 뭐, 참아야지.”

“그니까 참아야지.” 병원비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이때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의사의 그 야릇하게 비웃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야! 이 사람아’라고 하는 듯한 표정이 말이다.

남편이 강하게 “안 되겠다. 돈이 문제가? 수술하자”라고 했으면 못 이기는 척

“그러면 수술할까?”하고 콜을 했을 텐데....

옆에서 졸고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입원한 지 36시간이 지났다.

아기는 나오고 싶어 하는데 나는 기진맥진하여 아기를 푸시할 힘이 없었다.

산모, 태아 모두 위험하니 바로 수술해야 한다며 의사가 우리의 의향을 묻지 않고 수술 준비를 시켰다.

나는 수술실로 옮겨지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부분마취 상태로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36시간 산통 후 제왕절개 수술은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한 최대의 멍청한 이벤트였다.

메스를 들고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절개를 가로로 할까요? 세로로 할까요?”

“박사님은 어떤 게 편하세요?”

“저는 세로가 편하긴 한데..... 비키니 안 입으실 거예요?”

“비키니 안 입어요. 편한 방법으로 빨리 수술해 주세요.”

“그래도 최대한 비키니 라인 근처로 많이 올라오지 않게 세로 절개 해 볼게요.”

“OK, Hurry Up!”

나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빨리 끝내고 싶었다.

갑자기 간호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Oh, My God. Look at her hair. How pretty!”

백인 신생아는 아주 가는 금발이어서 마치 대머리 같다.

풍성한 검은 머리를 갖고 태어난 동양인 아기가 그들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남편이 탯줄을 자르기 전에 간호사가 내 가슴에 아기를 올려주었다.

첫째는 태지가 덕지덕지 묻어있었지만, 너무너무 예뻤다.

남편이 탯줄을 자르고, 의료진은 간단한 검사를 한 후 우리에게 포토타임을 주었다.

남편은 사진을 한두 장 찍고는 슬며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비디오는 찍을 생각도 안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너무 못생겨서 충격을 받아서 그랬단다.

첫째의 태몽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태양을 치마폭으로 받는 것이었다.

아들 꿈이다.

남편은 5대 독자다. 그래서 간절히 아들을 바랐다.

초음파 할 때 남편은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육아용품을 블루로 준비할까요? 핑크로 준비할까요?”

“옐로로 하세요.”

남편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초음파 할 때마다 계속 물어보았다.

결국 의사가 ‘핑크’로 준비하라고 했다.

‘딸이다’

남편은 그때도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수술 후 간호사가 따뜻하게 데워진 담요로 온몸을 감싸주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담요는 그야말로 포근하고, 부드럽고, 아늑하게 나를 천국으로 안내했다.

수술에 참여한 의료진들이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온갖 미사여구로 출산을 축하해 주었다.

출산의 고통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행복함이 밀려왔다.

나는 병실로 돌아왔다.

간호사가 “수술 부위는 수술용 스테이플러로 한 번 더 봉합하고 손바닥만 한 방수 테이프를 부쳐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샤워하라.”라고 하면서 “내가 도와줄까? 아니면 남편한테 도와달라고 할래?” 물어보았다.

당연히 남편이지! 샤워하면서 남편에게 “샤워하고 나가면 미역국 먹을 거니까 데워 오라”라고 하니

남편의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미역국이 차 트렁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미역국이 꽁꽁 얼어 돌덩이 같았다.

내가 분명 병실에 올려다 놓으라 했건만 밤에 의사랑 노느라 깜박한 것이었다.

뜨거운 물에 미역국 통을 담가서 조금씩 녹을 때마다 쥐어짜듯이 따라 내서 미역국을 먹었다.

눈치도 없는 데다가 생각까지 없었다.

간호사는 아기가 울 때마다 데리고 와서 모유가 나오지 않아도 젖을 물리라고 했다.

초유가 나올 때까지 아기에게 젖병으로는 물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숟가락으로 목만 축일 정도로 물을 준다고 했다.

그래야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아기가 ‘젖 먹던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하루 이틀 정도는 굶어도 탈수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그전에 초유가 반드시 나온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었고, 간호사의 지시대로 초유 수유에 성공했다.

첫째는 첫돌 때까지 모유를 먹었다.

내가 만약 초유 수유에 실패하고 모유 수유도 못했다면, 그 원인은 꽁꽁 언 미역국이 되었을 것이고

남편은

두고두고 나에게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199*년 1월 1*일 오전 9시에 둘이 병원에 들어와서,

199*년 1월 2*일 오후 4시 20분에 우리는 셋이 되어 병원을 나섰다.

병실 창으로 보이는 밖은 눈보라가 휘몰아치지만,

눈치 없는 남편과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의 아기와 내가 셋이 함께 있는 병실 안은 너무나 포근했다.

나에게 첫째가 태어난 날은 가장 추우면서도, 가장 따뜻한 날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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