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니 MBTI검사해 봤나?”
“응, INFJ”
“난 ISTJ. 니랑 내랑 두 개 다르네. 가르쳐줄까?”
“근데 니 E 아니가?”
“사람들이 다 나를 E로 알고 있는데 내 I다.
니랑 내랑 차이점 알려줄게. 나는 사과를 보면 그냥 사과야.
니는 사과를 보면 그 아들 머리 위에 사과 올려놓고 화살 쏘는 거 그거 그거.... ”
“윌리엄 텔의 사과?”
“응, 그걸 떠올려. 그리고 사과를 보면 애플, 애플”
“뭐? 아이폰?, 스티브 잡스?”
“응, 와이리 단어가 생각이 안 나노. 서글프다.
근데 너거 신랑 MBTI도 궁금하다. 연구 대상 아이가?”
나도 남편의 MBTI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남편은 부지런하다.
이마트 **점 개점하는 날도 온 식구가 가야 했고, 광안대교 개통하는 날도
생후 6개월 갓 지난 막내까지 데리고, 밤에 봐야 예쁘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구경했었다.
광안리 불꽃 축제, 크리스마스트리 축제, 단풍놀이도 매년 갔어야 했고 방학 때마다 가족여행도 다녀왔다.
남편은 A4 용지에 여행 타임테이블과 여행지 정보를 프린트해서 우리 손에 쥐어 주었다.
뜨고 있는 핫플은 꼭 들러야 했다.
맛집 리스트를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있었다.
혼자보다는 가족이랑 늘 뭔가를 해야 하느라 주말에도 바빴다.
남편은 상처를 잘 받는다.
둘째는 아빠보다 빽가가 좋다고 했다가 두고두고 원망을 들었다.
‘나는 가수다’를 함께 시청하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면 꼭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우리도 함께 응원해 주길 바란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여자 셋은 취향이 아빠랑 다르다.
절대 응원할 수 없다. 채널 돌리고 싶어질 지경이다.
막내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똥이 자기한테 튈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막내는 어려서 음악 취향이란 것도 없을 때다.
식탁이 아닌 거실에 교자상을 펴고, 평소에 먹지 못하는 특식을 먹으며, 아무 음악이나 들으면 된다.
아빠랑 눈이 마주치면 아빠 편을 들어야 하고, 그럴 때 여자 셋의 보복이 두려우므로 아빠를 외면한다.
소외감을 느껴 또 상처받는다.
남편은 음악을 좋아한다.
한 달에 한 번 도서관에서 클래식에 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빌려 와 다 같이 시청한다.
아이들은 감상문도 적어야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영화를 보여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의 중학교 음악 선생님께서도 클래식에 관한 영화를 여러 편 보여주시고 감상문을 요구하셨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집에서 아빠가 다 보여 준 영화고, 감상문도 쓰고, 아빠한테 첨삭도 받았었다’라고 이실직고했다고 한다.
음악선생님께 둘째는 3년 동안 엄청난 예쁨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아빠는 너무 멋진 분’이라고 하셨단다.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다.
선생님께서 진짜 저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빠보다 빽가를 선택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멘트인지
우리는 모른다.
막내가 서울로 진학하면 막내의 방을 남편은 진공 앰프가 있는 자신의 오디오 룸으로 꾸미고 싶어 했다.
독학하여 혼자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특히 좋아했다.
부산 시향에서 공연 안내 문자가 올 때마다 나를 들들 볶는다.
억지로 끌려가긴 했지만 막귀인 내가 졸면서 들었어도 실황 공연들은 감동적이었다.
몇백 장의 클래식 음악 CD를 버릴 때는 가슴이 아팠다.
남편은 감수성이 풍부하다.
드라마를 보며 울기도 잘하고 비 오는 날은 드라이브도 자주 간다.
기념일마다 선물, 식사, 꽃다발도 꼭 챙기는 로맨티스트다.
모든 걸 현금으로 받고 싶어 하는 현실주의 아내를 만나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은 기록을 좋아한다.
본인도 기록을 잘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일기 쓰기를 강요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일기를 써야 하니 아빠에게 따로 검사받지 않아도 됐었다.
중·고등 한참 예민한 시기에 아빠가 일기 쓰기를 시켰으니 반항할 만도 한데 꾸준히 잘 썼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일기 쓰기를 시킨 건 잘한 것 같다.
건성으로 대충 쓸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의 생각과 고민을 진솔하게 쓰고
아빠도 거기에 진심을 담아 멘트를 달아 놓았다.
사춘기 딸들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한 번씩 꺼내 읽어보면서 ‘맞아! 그때 그랬었지’ 하면서 우리는 웃는다.
막내는 시키지 않았다.
워낙 알아서 잘하고 잔소리할 것이 없는 모범생 그 자체였고
글쓰기를 혼자 곧 잘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각서 받기도 좋아한다.
각서 쓰기는 매우 쉽다.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면 된다.
머리를 쥐어짜야 완성되는 반성문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A4용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받아 놓은 각서들을 남편은 버리지도 않고 다 모아 두었다.
남편의 손때가 묻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이 각서들은 나도 버리지 않았다.
특히, 둘째의 것들은 채무 변제의 각서이기 때문이다.
돌려받지도 못하면서 남편은 매번 각서를 쓰게 하고 돈을 빌려주었다.
남편은 커피를 좋아한다.
각종 커피 도구로 여러 버전의 커피를 대령하는 ‘우리 집 카페의 나만을 위한 바리스타’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남타커가 아닌가? 특히 남편이 타 주는 커피!
남편의 손때가 묻은 커피 도구도 많이 버렸다.
이때도 참 슬펐다.
남편은 잔소리가 심하다. 싫다.
온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면서 잔소리했다.
한 번씩 내려오는 첫째에게 특히 심했고 다시는 부산 안 온다는 말을 남기고 늘 울면서 집을 나섰다.
남편은 욕을 하면서도 역까지 데려다준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첫째는 역으로 울면서 갔다.
이럴 때마다 한 번도 남편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별일도 아닌 일로 딸의 눈에 눈물을 빼는 남편이 미웠다.
한 번쯤 남편의 편을 들어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남편의 MBTI는 ENFJ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모두가 E라고 유추하는 친구의 성향이 I이듯이 남편도 본인이 직접 한 검사에서는 달리 나올 수도 있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훌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그에게 다시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잘 지내시나요? 그리고 당신의 MBTI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