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안전 안내 문자가 들어온다. 눈이 내리고 있으니 유의하라는 내용이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커튼을 열고 아직은 어두운 밖을 본다. 도로는 지열로 눈이 녹아 젖어있고 차량, 주택의 지붕에는 제법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첫눈, 첫사랑, 첫아이, 첫돌 등 ‘첫’ 자가 들어가면 왠지 설렌다. 이 중의 대부분은 인생에서 한 번이지만 첫눈은 해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짧아도 너무 짧은 가을이 이렇게 가는 것인지 아쉽지만 첫눈은 그래도 반갑다.
첫눈이 오면 중학교 동창이 생각난다. 2학년 겨울 방학 첫눈이 오는 날 친구가 전화로 눈이 오니 밖을 보라고 알려주며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한다. 친구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었다. 학교 바로 근처여서 방과 후 들러 허기진 배를 채우는 우리들의 간식 창고였었다. 겨울엔 잔치국수, 고구마, 떡국, 단팥죽 등이었고 여름엔 콩국수, 미숫가루, 과일 등 메뉴도 다양했었다. 당시에 그 집엔 우리보다 두어 살 많은 다리를 약간 저는 식모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모든 음식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철없던 우리는 우리끼리 놀기 바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잘 먹을게’ 입으로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학교도 가지 않고 늘 집안일을 하고 있는 언니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그 시절의 우리는 이제야 고마움을 느끼고 한 번씩 친구와 언니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친구의 집은 상당히 부자였었다.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에 기사 딸린 승용차로 우리를 극장도 데려다주고 겨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해운대도 데려다주곤 했었다. 전자제품은 금성만 있는 줄 알았던 우리는 소니 컬러텔레비전으로 일본 만화 보는 것도 신기했었다. 우리 셋은 3학년 올라가면서 다른 반으로 배정받아 아쉬웠지만 방과 후에는 여전히 친구의 집에 모여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우리는 셋이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래도 방학 때가 되면 다시 뭉쳤다. 고 2 겨울방학에 친구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집으로 찾아갔었는데 그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이사를 하거나 전화번호가 바뀌면 그쪽에서 연락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친구는 개학하고 학교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숨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니 다시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자고 했는데, 아직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눈이 내리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러브스토리’라는 영화 속 ‘Snow Frolic’이 흐르는 가운데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눈밭에서 ‘Snow Angel’을 만드는 모습이다. 짐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이터널 선샤인’ 속의 눈 덮인 찰스강 광경도 좋아한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고 전화로 알려주던 그 친구가 겨울이 되면 생각이 난다. 친구와 언니가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안전 안내 문자로 눈을 떠 다시 잠들지 못하고, 묻어 두었던 추억을 꺼내 눈처럼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 내본다. 영화도 다시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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