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속의 친구

동굴이 아니라서 다행

by 아이만 셋


이십여 년 전 겨울, 친구들 몇이 아이들을 데리고 2박 3일 경주에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정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병원에 간다며 우리 집에 아들을 보낼 테니 데리고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그 날 밤늦게 서야 친구는 합류했다. 넘어져 골절상을 입는 건 젊은 우리에게는 정말 별일 아닌 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날의 골절로 인해 어머니는 10년을 넘게 침대에 누워계셨다. 부러진 뼈가 붙는 동안 근육은 소실되어 걸을 수가 없었고 와상 환자가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간병하셨는데 어머니는 미안해서 식사를 잘 하지 않아 속상하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상태가 점점 나빠져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모셨고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주말에 전화하면 늘 병원에 가지고 갈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때론 늦은 밤에 전화가 온다. 남편에 대한 푸념이지만 듣고 보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머니 일로 지친 그녀의 예민함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연이어 아버지가 편찮으시다. 여전히 주말엔 아버지에게 드릴 반찬을 만들고 있다. 부모님 병시중을 독박으로 이십 년이 넘게 하고 있다. 형제, 자매가 있기는 하나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모두 같지는 않더라고 하며 서운해한다. 어머니 병간호는 아버지와 교대로 하니 간혹 늦은 밤에 만나 치맥을 하고, 더 늦으면 차에 앉아 신세 한탄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슬기로운 간병 생활이랑 병원 생활에 대해 나에게 알려준다. ‘연명치료 하지 마라. 제일 후회되는 것이 내 마음 편하게 하자고 하나님 곁으로 빨리 보내드리지 못하고 엄마 고생 시킨 거다.’라고 한다. 20년 넘게 부산에서 요양병원, 재활병원을 수도 없이 옮겨 다녀 정보가 많다.


우리는 중학교 3학년, 열여섯 단발머리 소녀로 만났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해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나에게 전도를 했고 우리는 주말에 교회에서 만나 우정을 키웠다. 나에게 함께 하길 권한 유일한 것이 종교이다. 시위대 선봉에 서 있었지만 한 번도 나에게 이념 서적 읽기를 권하지 않았다. 시위가 있을 조짐이 보이면 학교를 일찌감치 떠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면 친구는 보도블록을 깨고 있었다. 그녀는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고, 나는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나는 턱을 들고 다니고, 생각이 많은 그녀는 고개를 숙여 땅을 보고 걷는다. 그녀의 삶은 매사 치열하다. 설렁설렁 공부하는 나와는 달리 언제나 열공 모드였고, 나에게 새벽 기도는 아예 선택지에 없는 반면 그녀는 새벽마다 교회에 갔었다. 갭투자를 범죄시하며 저축으로 내 집 마련을 했다. 남편이 ‘너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찌 친구가 되었는지.....’라고 했다.

“너는 후유증 없이 잘 회복하고, 엄마도 툴툴 털고 일어나시고, 간병도 나누어서 하고, 주식으로 수익도 보고.... 근데 내 팔자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주변 환경 보지 말고 너만 봐. 너는 착하고 능력 있는 교수로 성공한 인생이야. 나는 주변 말고 아무것도 없잖아. 내가 없다고.”

친구는 평생 처음 손댄 주식이 네이버와 카카오로 고점에 사서 물려 있고, 그녀의 남편은 글을 쓰며 혼자 노년을 즐기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홀로 병든 아버지 간병과 직장 생활을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쭉정이 패만 주셨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패를 가졌든 힘든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독이며 잘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친구는 경주를 유난히 좋아한다. 헤어질 땐 매번 ‘우리 조만간 경주 한번 가자!’ 혹은 새해 인사를 주고받으며 ‘올해는 꼭 경주 가서 자고 오자!’라고 한다. 힘든 간병의 늪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거다. 기나긴 간병의 터널에서 잠시 벗어나 함께 경주를 다녀와야겠다. 그녀가 있는 곳이 깊고 어두운 동굴이 아니라 출구의 빛이 보이는 터널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미지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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