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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옥미 Jun 04. 2021

나도 엄마 편이야..

엄마의 외로움을 차라리 외면하는 편이 편했을지도..


길을 가다 흰머리의 멋쟁이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면 꿈에도 잊고 싶지 않은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7년 전 91세의 연세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이북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의 허투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강직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억지로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히셨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북송을 선택하지 않고 남한에 남으셨다. 이북에 가족이 남아 있었음에도 공산당이 싫었다는 아버지는 다시 북한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가족을 남기고 특히 아내와 딸이 북에 남아 있었음에도 남한에 남으셨을 때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당시의 교육 환경을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영어를 읽으실 줄 아셨고 한자도 꽤 많이 아셨던 박학다식하신 분이셨다.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는 자신을 돌보고 자식들에게도 민폐를 안 끼치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다. 아버지의 지혜는 젊은 조카들도 할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다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노인요양원에 계셔서 가끔 찾아뵙는 엄마는 95세이다. 내 얼굴을 보면 요란하지 않게 미소를 짓고 반가워하셨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반응하지 못한다. 눈도 못 뜨고 소리에 약간의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면 듣기는 하시는 것 같다. 엄마는 일본강점기 때 일본군 강제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시려고 결혼을 일찍 하셨다. 18살에 결혼을 해서 2, 3년 터울로 3남매를 낳았다. 금술도 좋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홀로 3남매를 키웠다. 외할머니의 눈에 남한에 남아 순사를 했던 훤칠한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적극적 중매로 아버지와 엄마는 재혼했다.     

두 분이 결혼 후에 오빠와 언니 세 명을 낳았다. 전쟁 통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셨다는 것을 안다. 굶기지 않기 위해 절대 빈곤 속에서 그날그날을 견디며 사셨던 것 같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신을 꾸미는 일에는 열심히 투자하고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당시에 백구두를 신을 정도면 얼마나 멋쟁이셨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해서 거절도 못 하고 남에게 퍼주다시피 하며 사셨다고 한다. 그에 반해 엄마는 생활력이 좋으셨다. 좋았다는 표현보다는 살기 위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건축을 할 때 도면 보며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을 도목수라고 불렀는데 아버지가 그 일을 했다. 도목수 일을 했던 아버지가 무능하시지는 않았는데 버는 돈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커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량처럼 밖으로 돌았고 외도도 하셨고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엄마에게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로 인해 엄마의 고단한 삶에 돌덩이보다 더한 무게가 실렸다.


엄마는 아버지를 잘 따랐던 날 향해 아버지의 원망을 가끔 쏟아 냈다. 엄마는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존경함이 있었기에 앞에서는 항상 말조심을 했다. 하지만 내면에는 속상함과 서운함이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 편에서 이야기하는 날 싫어했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 대해 불편한 내색을 비출 때면 난 듣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며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엄마는 왜 나한테 그런 소리 해!!”

“저 지지배는 지 아버지 편만 들어!!”     

그러다 보면 엄마는 안 좋은 소리를 더 쏟아냈다. 아직 어렸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어쩌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만난 것처럼 회피하고 싶었으리라.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일종의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강한 부정이 있었다. 

    

나이 많고 꾸밀 줄 몰랐던 엄마를 부끄럽게 여겼었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안다. 그런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식보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식들의 미래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던 엄마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지금 요양원에서 누워계신 엄마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어렵다. 고단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노년에 거동도 못 하고 자식도 못 알아보며 나 자신에 대해 다 내려놓아 버린 엄마의 모습이 너무 앙상하고 초라하다. 

    

아버지가 5년 전에 돌아가시고 엄마에게는 그 사실을 말씀 못 드렸다. 그렇게 젊었을 때 엄마 속을 썩였는데도 엄마는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다. 아버지도 노년에는 젊었을 때를 보상하듯 엄마를 많이 아끼셨고 아픈 엄마를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도 곁에서 돌보시며 애지중지 마음을 쏟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말하면 엄마도 금방 아버지를 따라가실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 곁에 그저 조금만 더 계셔주시기 바라는 마음에 형제들 모두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지금은 엄마가 이렇게 사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힘드신 상태다. 가끔 요양원에서는 가슴 철렁한 엄마의 상태를 전해줄 때마다 우리 욕심에 엄마를 너무 고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말씀은 못 하셔도     

“영감이 왜 안 오는 거야?”

“혹시 바람을 피우는 것 아니야?”

속으로 노심초사하고 계시지나 않을지....     

“엄마! 내가 점점 나이 먹으니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아.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엄마를 많이 닮은 난 엄마 편이야.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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