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감정 박물관을 다녀와서
오늘은 핀란드의 감정 박물관(Museum of contemporary emotions)에 다녀왔다.
핀란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유행기 동안 국민의 정신 건강을 위해 Finland Forward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감정 박물관은 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코로나 시기의 감정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 감정을 수집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사이트의 설명을 자세히 읽어보니 통계자료, 검색어 동향, 소비 행동, 각종 기관의 연구,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발생한 현상, 비상사태의 주요 국면들에서 보이는 뉴스 및 국민의 이동/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감정을 수집했다고 한다. 수집된 자료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데에 이용됐다고 한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데이터 분석 보고서가 아닌 1인칭 시점의 일기들이 시기와 감정에 맞게 큐레이팅 되어 있었다. 데이터는 각 일기를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슬며시 끼워져 있었다. 사회나 문화, 가족 구성이 달라 감정을 느끼는 구체적 지점은 살짝 다를지라도 모두 나도 경험해 본 감정이었다.
감정 전시가 끝난 뒤에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활동이 주어졌다. 작성한 편지는 핀란드 국가 기록원에 연구 목적으로 아카이빙 되며, 작성자가 동의하는 경우에는 편지가 웹사이트에 익명 공개될 수 있다고 한다. 귀찮아서 넘어갈까 하다가 'Now is the time to look to the future.'라는 말에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 적은 있었는데 미래를 바라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영어로 쓰다가는 오늘 브런치 원고 작성을 못할 것 같아서 브런치에 한국어로 편하게 작성해 보았다.
참고로 심리치료사가 동영상에서 언급한 활동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니 번역의 품질은 보장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과 전 세계 현황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상황에 놓여있는 당신을 바라보세요
5년 뒤 당신에게 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5년 뒤, 어떤 것들이 사소해지고 작아질까요?
어떻게 회복하셨고 나아가셨나요?
미래로 나아가는 동안 어떤 역사를 써나가고 있을까요?
5년 뒤 나에게.
안녕? 나는 5년 전인 2022 1월 22일의 나야. 지금 나는 해오던 취업 준비를 그만두고, 나의 즐거움과 쓸모를 찾고 있어. 요즘은 독서모임에도 가고, 소설과 일기를 쓰고 있지. 지금 전 세계는 오미크론이라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 때문에 다시 긴장의 고삐를 조이고 있단다. 내가 보기에는 독감 백신처럼 최소 1년에 한 번은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아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정작 바이러스에는 무감각해진 것 같아. 마치 어떤 외국인들은 전쟁 날까 봐 한국 여행을 꺼리는데 정작 한반도에 사는 나는 무감각한 것처럼. 처음 한국에서 집단 감염자 수십 명이 나올 때는 기겁했지만 지금은 수도권에서 수천 명이 걸려도 처음처럼 기겁하지는 않는 것 같아.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것 같아.
인간은 적응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희망적이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나를 옭아매는 것들에 익숙해지면 유리병 뚜껑을 열어도 탈출할 생각이 없는 벼룩처럼 될까 봐 무서워. 한편으로는 나에게 도움 되는 습관에 적응하면 유리병을 끝내 탈출하는 벼룩이 될 수 있겠지? 지금으로부터 5년 뒤의 너는 어떤 벼룩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구나.
지금의 나는 자유롭지만 또래 친구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창피함과 죄책감도 가지고 있어. 항상 남들과 비교하는 습관을 가지다 보니 코로나가 처음 발병했을 때는 솔직히 안심했었어. 코로나 발병 전에는 경기장에서 나만 주저앉아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주저앉는 것을 보고 위로받았었거든. 다행히 상담도 받고, 약도 꾸준히 먹고 있고, 독서도 많이 해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어. 일어서서 경기장을 둘러보니 이젠 주저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건네고 싶어 졌어. 아직 달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앉아있는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여력은 생겨서 다행이야.
나는 즐거움을 먹고 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서 어떤 즐거움을 먹을지, 나의 즐거움을 어떻게 재미와 감동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어. 지금은 남들보다 늦어지는 것, 그리고 실패하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 있지만 5년 뒤의 너는 몇 년 늦어지는 것과 실패하는 것에 초조해하지는 않을 것 같아. 도전하지 않는 것을 초조해할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5년 뒤의 너로 찾아가며 남기는 내 발자취를 보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짧게 쓰기로 했는데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일게.
그럼 안녕!
핀란드 국민의 세금으로 대한민국에 사는 백수가 무료로 박물관도 여행하고 일기 작성 도움도 받았으니 다음 유럽 여행은 핀란드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