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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Dec 23. 2021

겸손한 슈퍼영웅들에게 사과를

항상 곁에 있지만 진가를 몰라줬던 사람들에게

컨디션도 안 좋고 잠도 안 오는 어느 새벽. 멍 때리며 순록을 다루는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는 순록을 관리하는 유서 깊은 가문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순록 한 마리가 끄는 썰매를 몰고 며칠에 걸쳐 야영을 한다. 오로라를 찍을 만한 장소와 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다. 


첫 야영을 하는 날 밤. 진행자는 텐트 안에 누웠지만 밤의 포식자들이 하나뿐인 순록을 잡아먹을까 봐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밤에 동물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진행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텐트 바깥으로 나간다. 휴대용 손전등을 켰는데 뿔이 보이자 또 다른 순록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기 뿔이 보이네요."
"휴! 다행히 순록이었네요."


다큐멘터리 중 이 장면이 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같은 날 읽은 피프티 피플이라는 소설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조심해야 할 건 사슴류입니다.
"곰보다요?
"곰보다 사슴류의 동물이 훨씬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짝짓기 철의 사슴은 예민해서, 놀라게 하면 사람의 내장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뿔로 헤집는다고 했다. 대환은 내장 없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싶지 않았기에 뿔 비슷한 것만 보여도 피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더 무서운 동물일까?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으로 보냈던 시기, 나는 앞만 보고 1등을 향해 달렸다. 부끄럽게도 달리는 동안 나보다 안 될 것 같은 사람을 보며 위로 대신 안도를 했던 것 같다. '아이 뭐야. 괜히 긴장했네.'라고 생각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각자 나만의 비장의 무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달리기 경주를 그만두고 경기장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설픈 나만의 무기를 자랑하느라 바쁜 나를 보며 다른 참가자들은 여유 있게 자기만의 무기를 갈고닦고 있었던 것이었다.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동안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안도의 한숨에 상처 받았을 슈퍼영웅들에게 사과, 위로, 존경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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