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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Jan 19. 2022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하다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도 나

 항상 본가에 가면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귀찮아 미루던 일이 있었다. 엄마가 모아놓은 내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그냥 버리는 것도 아니고 불태우길 원했던 이유는 내 일기장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훈련소 생활과 군 복무 중 써야 했던 감사일기와 버킷리스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휴대폰의 내 사진을 보다가 본인도 모르게 웃은 휴대폰 대리점 직원의 모습, 내 감사일기를 훔쳐 읽으며 피식 웃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창피해진 나는 스파이처럼 내 자취를 모두 감추리라 마음먹었다. 책장의 가상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 엄마를 속일지 나름 계획도 세워놨다. 하지만, 무기력이 가득했던 최근까지도 일기장 태우기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조차 큰 용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그 깜찍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브런치에 일기를 다시 쓰게 된 이후 본가에 내려가게 되자 그 벼르던 일이 생각났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없애고 싶어 했던 일기장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심호흡을 하고 명상을 해도 긴장되고 심란한 마음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결국, 휴대폰 사진으로 일기장 몇 페이지를 대충 찍고 일기장을 바로 덮어버렸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엄마가 모아놓은 일기장들 중 절반만.

 그래도 시간 내에 오늘치 일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서 담임교사의 코멘트와 일기 제목만 대충 훑어봤다. 내용을 다 읽어 보지 못했지만, 글씨체만 봐도 그때의 내 속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일기 쓰기 싫어 침대에서 대충 쓴 일기,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또박또박 쓴 일기들이 대충 보였다. 지금의 나도 눈치챌 정도이니 그때 당시 지금의 나보다 더 연세가 있으셨던 선생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내 감정을 꽤 솔직하게 적어놨었다. 학원과 학교 숙제에 TV까지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짓말을 할 여유가 없었나 보다. 아빠 심부름하기 싫다느니, 수학이 너무 싫다느니, 숙제하기 너무 싫다느니 하는 푸념은 여과 없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하의 감정과 사건은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쓰는 대신에 아예 쓰지 않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연륜(?)이 느껴졌다. 솔직한 감정과 생각은 논술 학원에서 배운 내용으로 완전히 덮어썼다. 그런 내용들이 길고 좋다고 평가받았으니('A++') 그때 당시의 나로서는 괜찮은 전략이었다. 그런 일기들은 제목만 봐도 재미가 하나도 없어 읽고 싶지도 않다.


 감추고 싶은 나의 과거를 굳이 보관해주신 엄마, 그리고 일기를 태우지 못한 나 자신에게 감사한 날이다. 다음에는 이 일기들을 좀 더 자세히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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