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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Feb 14. 2022

있던 일로 하겠습니다

아픈 기억을 빨리 잊기 위해

사건은 일요일 오후 어느 카페에서 발생했다.

본가로 잠깐 내려온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음료와 빵을 먹고 있었다.


크림빵을 먹는 누나에게 조금만 먹으라고 잔소리가 날아온다. 누나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받아친다. 운동 얘기를 하고 있다가 이번엔 나에게 잔소리가 날아온다. 나는 잔소리를 받아치지 못했다.


"그렇게 운동하라고 명령하면 누가 운동해?"

"내가 너한테 한 두 번 잔소리하냐?"

"무슨 말을 꺼내면 이상하다고 하고, 명령만 해대면 누가 아빠하고 얘기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거야?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아빠는 내 멱살을 잡고 세게 한 대 후려쳤다. 주말 연속극의 등장인물이 된 듯했다. 

아빠는 자상하다. 아빠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할 때만.

그러므로 아빠는 거의 항상 자상했다. 오늘만 빼고. 


"네 눈빛은 아주 경멸적이었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가 독심술가처럼 말했다.

아빠에겐 당신의 의견을 거부하는 것은 곧 당신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더 싸울 힘이 없었으므로 나 먼저 사과했다.

"다음부터는 운동할게요. 감정 조절을 못했어요. 죄송해요."

"나도 못했다.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응?"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주 들락거리는 자기 계발 커뮤니티에서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 공유된 적이 있었다. 고통이 몸의 어느 부분과 연관되어 있는지 느껴보고, 고통의 빛깔, 촉감, 온도를 느껴보라는 것이었다. 상처에 굵은소금을 문지르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없는 일로 친다고 해서 있는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것 또한 아니므로 속는 셈 치고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마음의 고통이 생길 때 주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은 콩닥거린다. 머리에 이마를 갖다 대니 머리의 뜨거운 기운이 차디찬 손에 옮겨 붙었다. 파란색 손에 뜨거운 기운이 붙으니 손은 붉게 물들더니 따뜻한 보랏빛으로 변했다. 반대쪽 손으로 가슴을 몇십 초동안 갖다 댄 뒤 손을 봤다. 시퍼렇게 찐득한 물감이 묻어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에 묻은 물감과 세균을 비누로 꼼꼼히 씻었다.


대니얼 웨그너(Wegner)가 실험한 '북극곰 효과' 연구를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카페에서 생긴 사건을 없던 일로 하다가는 내 몸과 마음을 그 사건이 지배할 것 같아, 이번에는 있던 일로 생생히 재현하며 감정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없던 일로 하자는 아빠와 있던 일로 하자는 아들의 비교 실험 결과가 내심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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