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보고서> 김금희
언젠가 눈 오는 날의 창경궁 대온실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하얀 설경 속 레이스 같은 프레임에 유리로 된 건축물 사진에서 고요한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거기에 100년이 넘은 건축물이라는 이력은 어딘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깃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제목을 쓰기까지 여러 번을 고쳤다. 흉터를 무늬로 ‘만드는, 바꾸는, 고치는, 다시 그리는, 수리하는, 되게 하는, 인식하는, 가꾸는, 다듬는…’ 그 중 작가의 말에서 적당한 단어를 만났다. 이해한다는 말. 모 드라마에서 주인공 남녀가 잠시 헤어질 때, 당신의 마음과 선택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이 참 세련되다고 느꼈는데, 작가의 말을 보며 ‘이해한다’는 말의 결과 깊이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단어 하나가 이러한데, 419p의 이야기와 그 언어의 배열, 의미를 엮는 일에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야기를 내놓기까지 작가가 소화한 방대한 참고 자료는 논문 그 이상이다. 집착이 느껴진다.
첫 번째 질문_ 전체적인 감상은?
유 : 솔직히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서 백방으로 알아봤다. 처음 펼쳤을 때 1장 제목이 원서동, 주인공이 낙원하숙에 살 때 그 동네에 살았었다. 2천년대 초반, 주인공이 프리랜서로 보고서 쓰는 일을 하는 것도 내가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상황과 비슷하고, 모든 게 내 얘기 같았다. 마지막에 경주 나자레원이 나오는 데, (유는 경주 출신) 이건 운명인가 했다. 그래서 바로 담당PD에게 연락해서 작업해보고 싶었지만 작가님께서 이 책을 드라마화할 지 결정을 못내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거기다 요새 '첫여름 완주'라는 작품을 보니 드라마화 하더라도 그냥 작가님이 쓰시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기획안을 써서 보내봤다. 그 정도로 이 소설이 좋았다. 많은 이야기들이 겹치며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배경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이 책 참고도서의 1/10도 안되더라.
경 : 떡 벌어지게 차려진 한정식 같은 느낌.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읽은 소설이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보는 것도 흥미진진. 예민한 사람의 얘기들을 다룰 때 빈 구석이 생기면 이야기가 깨지는데, 이렇게까지 촘촘하게 연결했구나 했다. 주인공이 리사랑 되게 불편한 사이인데, 얘기하는 것 보면 또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다행히 영두가 좀 강해져서 후에 리사가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할 때 당당하게 대처해서 좋았다. 또, 대온실에서 뼈를 발굴하는 과정도 흥미진진했고, 할말하고 의리지키는 제갈도희, 소장, 소목, 학예사 등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도 좋았다. 친구 딸과의 대화부터 한일 역사적 관계까지 이야기가 어디까지 픽션인지 너무 찾아보고 싶었다.
매 : 제목 때문에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일거라 예상했는데 많이 달랐다. 이렇게 집착하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스타일이 질릴 정도로 멋있었다. 이야기들이 실재와 허구가 교묘하게 연결되고, 그 디테일들을 징글징글하게 파고드는 느낌. 이렇게까지 한다고? 특히, 강화도 말, 섬사람들 특유의 것을 외부인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보였다. 전체적으로 밀도가 높고 방대한 이야기인데, 한 씬 한 씬은 감성도 있고, 묘사, 단어의 디테일, 캐릭터까지 난리가 난. ‘뭐야? 이책?!’ 하면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압박감을 즐겨야 되는데, 즐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부담스럽달까. 이정도는 되야 책을 내는 것인가 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할머니가 학교에 찾아왔을 때 나같으면 '네'라고 했을텐데, 영두의 대답을 보며 ‘아 내가 되게 무디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예민한 사람들을 좋아하면서도 좀 진이 빠진다. 좋지만 싫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분이 작가가 돼서 다행이다. 다음에 나올 '나의 폴라 일기’(남극갔다와서 쓴 책)가 기대된다.
선 : 나는 리사가 나중에 좀 착해질 줄 알았다. 근데 끝끝내...
경 : 요즘 트렌드는 끝까지 못되더라. 그게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이즈음에서 우리 모임이 종종 그러하듯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얘기로 빠졌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 영두부터 할머니, 박목주, 소장 등등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 책의 빌런 중 빌런 '이창충' 얘기로 집중되었는데..
경 : 아빠와 남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동생에게 그는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그런데, 남동생을 구하고 싶어서 구했을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유 : 그 부분이 이 소설에서 되게 괜찮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창경궁 대온실 자체가 적산이다.
우리나라 것이 아니란 말. 건물 밑에서 시체가 나오고 하는데도, 결국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 것이 된 이야기를 쓰고 있다. 할머니의 남동생 입장에서 보면 그는 정말 세상에 아무도 없던 처지였는데 그 악인이 데려가서 그래도 안 죽고 살아있게 키운 이야기가 겹쳐진다. 이런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 게, 드디어 우리나라가 식민지성을 벗어도 되는 그런 시대가 왔다는 걸 작가가 알려줬다.
다 : 영두의 힘이 길러져서 사과해!라는 마음보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으로 성장한 것처럼?
유 : <영원한 유산>은 적산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너무나 탐스럽지만 혐오스러운, 그러나 아름다움은 부정할 수 없는, <대온실 수리보고서>는 적산을 우리가 좀 베풀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대온실과 낙원하숙을 같이 얘기하는데, 낙원하숙은 우리나라 기와가 있는 집이지만 주인은 일본 할머니다. 그 일본 할머니 것을 딸이 가져가려고 하는데, 결국 화자는 일본 할머니한테 돌려주려고 노력을 한다. 그게 식민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성정에서는 나올 수 없는 거다. 우리가 드디어 그것을 벗어버리는 이야기에 나는 깨닫는 것들이 있었다.
매 : 나는 그가 남동생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딸을 잡기 위해서.
경 :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양심 같은 건가?
유 : 자기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사람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 진짜 온데간데 없는 고아를 거둬줄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아직도 전체적인 감상평 얘기 중
효 : 나 역시 이 얘기가 어디까지 진짜이고, 어디까지 픽션인지 궁금했다. 사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산책하면서 ‘참 예쁜 건물이네’ 하며 식물 구경하는 것만 좋아했는데, 대체 어떤 영감을 받았길래 이런 얘기를 쓸 수 있었을까. 영두의 감정 묘사가 되게 피곤하다기 보다 나는 좀 '뭔지 알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야기의 레이어가 많은 편인데, 인물, 시대, 가정사 등 다 중요한 이야기라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다 : 예상을 다 벗어났다. 이동진 작가도 추천하고,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엄청 드라이한 내용일거라 생각했다. 인물의 서사보다 건축에 대한 얘기일거라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인물의 이야기였다. 피식피식 많이 웃었다. 영두가 강화도 토박이 할머니와 대화가 가능하면서도 MZ세대, 어린아이와도 얘기할 만큼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 매력적이었다.
선 : 예전에 모 호텔 사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스토리를 가진 그 호텔은 당시 일본 자본에 의해 지어져 최첨단, 최신식 문화양식이 도입되었다. 고종이 지었던 원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는 이슈가 있었다. 광복과 전쟁 통에도 살아남은 호텔은 유신시대에 와서 결국 헐렸고, 그 자리에 다시 국내자본으로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호텔이었다. 어쨌든 그 이름을 계속 쓰고 있고, 그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호텔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담아야 하는데, 뭔가 자꾸 마음이 불편했다. 이 호텔의 역사는 백년이 맞나, 이게 어느나라 호텔인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 호텔의 주인은 그곳을 지켜온 호텔리어들과 고객들이라는 방향을 잡으며 마무리 지어졌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불편한 마음도 이해가 되고,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이해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유 : 식민의 역사도 역사니까. 100년의 역사가 있었는데, 그 중에 안 좋은 역사와 괜찮은 역사가 있었던 거다.
다 : 지금까지는 계속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다가 이제는 좀 다음단계, 한 단계 나아가야 하는, 이것 또한 지금 ‘우리의 역사’로 좀 받아들일 수 있을 때인가 생각한다.
경 : 그렇게 관점을 바꾸면 지금 남아있는 일제시대 건축물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선 : 이렇게 되기까지 한 세대가 지나야 가능한 일 아닐까. 그 아픔이나 통증을 직접 겪지 않아 잘 모르는 세대가 와야 그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나오는 거 아닌가.
선 : 그런데, 전체 이야기에서 후쿠다의 일생을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들 이유가 있었을까?
매 : 후쿠다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대온실을 지은 의도와 태도, 소녀의 편지 등 모든 단서를 추적하는 영두가 일하는 방식, 파고드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유 : 작가가 환경이나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후쿠다는 포도 재배에 미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그래도 이 온실을 지었다고, 처음 시작한 목적 자체가 나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매 : 그렇게 들으니까 일제가 지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왜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지었는가, 대온실이 일제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어쩌면 식물에 미친 사람이 열정으로 지은 건물이다’로 얘기할 수 있겠다.
유 : 세 시선이 겹쳐 있다. 식물원으로 지었던 사람 후쿠다, 미개한 식민지 조선에 일본의 권위를 보여주려던 일본 총관, 조선 백성들이 수양을 할 수 있게 배풀고 싶었던 순종.
선 : 세 개의 욕망이 모인 곳
유 : 작가는 후쿠다의 시선,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 거지.
선 : 정치적인 시선이 아닌 그 자체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
유 : 박목주도 일하는 사람이었고, 영두도 일하는 사람, 제도 감독도 모두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두번째 질문_ 잊었던 곳, 혹은 잊었던 사람인데 한 번쯤 보고 싶은 장소나 사람이 있는지?
다 : 중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 번도 못 갔다. 지금은 주변이 너무 개발이 되어서 아쉽다. 작품 속 원서동이나 창경궁처럼 운치있는 풍경이 남아있으면 좋을텐데.
매 : 그리움이 느껴지면 바로 움직이는 편이다. 언젠가 고등학교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바로 만났다.
(다와 매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 교문 담 넘어 다닌 얘기, 만우절 얘기 등 급 추억여행)
또, 대학 때 스페인 어학 연수 갔던 도시(살라만카)를 남편과 다시 여행갔는데, 동네에 대로가 생기고 싹 바뀌어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딱 하나 남아있던 슈퍼만 알아봤는데, 그래도 좋았다.
유 : 친구들과 경주 여행을 가서 나의 중고교시절 투어를 했다. 그런데 시내 등이 너무 예쁘게 꾸며졌다. 예전에 구멍가게 사이에 고분이 있고 했는데.
경 : 그때 그 시절 좋아했거나 같이 생활했던 사람, 공간은 나에게 아무 의미나 감흥이 없다.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연락해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연락이 끊기거나 안 좋은 소식을 들어서 연락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소식이 좀 궁금하다.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텐데, 만남이, 그 끝이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고, ‘내가 그 사람을 찾으려는 의도가 뭐지?’ 생각하게 돼서 결국 연락을 못했다.
효 : 요즘은 시절인연이라고 생각해서 지나간 인연들을 굳이 보고 싶진 않다. 그런데, 보낸 편지함에서 20년 전 보냈던 편지들을 봤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있었는데, 같이 놀고, 싸우고, 교환일기 쓰던 10대 시절의 감성이나 감정(우정이란 뭘까? 같은)을 집약적으로 경험하게 해준 친구들이었다. 어느 날 사이가 틀어져서 중간에 힘들었는데, 결국 한 친구가 전학을 갔고, 그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글들을 썼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때의 내 말투와 글에는 그 시절의 내가 있었다.
선 : 고등학교 때 전학 온 친구와 급 친해졌었다. 늘 좀 우수에 차있고, 성적도 좋은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책을 보고 펑펑 울었다던 친구,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나보다 훨씬 성숙했는데, 그 친구는 대학을 가고 나는 재수를 하던 어느 여름날, 평소와 다름없이 만나서 놀고는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삐삐시절이라 연락을 해도 답이 없고, 나중에 아이러브스쿨이나 싸이월드 등을 다 뒤지긴했는데 접점이 아예 없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경망스러울 때라 뭔가를 잘못한 건지 좀 답답하고 미안했다. 지금은 다시 교류를 하고 싶다기 보다 그냥 잘 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세 번째 질문_ 알고 있는 생존 건물이 있나요?
조선호텔 원구단 터, 창경궁 대온실, 벽수산장(영원한 유산) 등
매 : 딜쿠샤,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 있던 외국인 선교사의 저택. 그 외국인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돌아오지 못하고...
유 : 그 건물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방방마다 살았다. 그런데, 서울시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새 단장을 하겠다 해서 그 사람들을 쫓아냈고, 분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깨끗하게 정리돼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내부를 꾸민 분이 낸 책도 있다.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들을 해외에서 공수해서 똑같이 꾸미고 했던 이야기다. 뮤지컬도 있고, 다큐도 있는 듯.
경 : 정동길에 손탁호텔 터도 있다. 고종이 하사한 땅에 독일인 손탁이라는 여사가 호텔을 짓고 운영을 했다고 한다. 1차 조일 조약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들을 협박하던 장소.
녹취가 이렇게 끝나버려서 좀 당황스럽긴 한데,
이후에도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갔다는 상상력을 발휘해 주시길. ‘이해하는 마음’으로 ^^
모임이 있던 날은 8월 한 여름이었는데, 기록하는 오늘은 2025년 12월 4일
서울에 첫 눈이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 눈 쌓인 대온실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일시 : 2025. 8. 16
장소 : 혜화 <크림슨 파더>
참석자 : 선, 유, 매, 경, 효,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