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2004)
“현재 세계 랭킹 119위입니다. 스포츠는 잔인하죠.
400만 명의 테니스 선수 중에 119위라니 나쁘지 않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은 118명이 나보다 더 빠르고, 강하고, 잘생기고, 젊다는 뜻이죠.”
영화 윔블던의 주인공 피터 콜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혼자 피식 웃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삶도 좀 그렇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보면 다들 뭔가 대단해 보인다.
양복에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셔츠를 입고, 텀블러 하나에 아메리카노 담아 한 손에 든 채 여유롭게 걷는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구겨진 셔츠에 출근 중이고, 집에서 마시다 만 커피는 싱크대 위에 그대로 있다.
출근 전에 샌드위치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를 내가 한 일이라고 한다면...... ‘빵 봉지 열기’ 정도랄까.
그래도 아침에 랩으로 감싼 샌드위치를 가방에 넣으면서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누가 보면 내가 직접 만든 줄 알겠지, 하고.
(그렇다고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다고 난 생각한다.)
회사에 가면 또 118명쯤의 ‘나보다 뭔가 나은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발표를 잘하고, 누군가는 팀장 농담에 웃는 척을 너무 잘한다.
그에 반해 나는 회의 중에 머릿속으로 점심 메뉴 고르고, 결재는 꼭 두 번씩 까인다.
아, SNS도 있다.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애 셋을 키우면서도 캠핑 다니고, 연차 내고 길게 여행을 간다.
나는 이번 달 목표가 ‘분리수거 미루지 않기’다.
그래서 자존감이 살짝 눅눅해질 무렵,
윔블던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처음엔 ‘스포츠 영화겠지’ 싶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테니스를 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삶을 다시 시도해 보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피터 콜트는 은퇴 직전의 테니스 선수다.
랭킹은 119위. 한창 잘 나가는 선수들 사이에서 그에겐 아무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윔블던 무대에 선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118명이 나보다 빠르고, 강하고, 젊다.”
그런데도 그는 라켓을 든다.
그 장면이 묘하게 찡했다.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완벽하지 않아도 다시 시작할 줄 아는 사람.
그걸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119등쯤은 되는 삶이구나. 그런데 꽤 괜찮잖아?”
요즘 나는 매일 아내와 도시락을 싸고, 같이 마트에 가고, 주말엔 청소를 나눠한다.
서툴지만 같이 맞춰가고, 가끔 피곤해도 함께 저녁을 차려 먹는다.
회사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사람과 함께 살고,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순위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119등쯤 되는 이 자리야말로
나답게, 편안하게, 유쾌하게 살 수 있는 딱 좋은 곳일지도 모른다.
윔블던은 그런 얘기를 한다.
삶이란 경기는 늘 젊고 빠르고 잘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실수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해볼까?’ 하고 다시 라켓을 드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이다.
누구는 인생이 마라톤 같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서바이벌 같다고도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인생은 어쩌면 ‘윔블던 예선전’쯤 아닐까 싶었다.
늘 누군가와 비교되고, 랭킹에 매겨지며, 그 순위로 나를 판단하게 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아직 코트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일이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해주었다.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이 영화는 오래된 응원을 건넨다.
“119등이어도 괜찮아.
그 자리는 아직 경기 중이잖아.
그리고 그 경기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아름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