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없지만, 도시락은 골라야 하니까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2002)

by 기억의 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을 다시 본 머글의 하루


호그와트에 다시 다녀왔다. 스크린을 통해, 오랜만에.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시리즈 중에서도 유독 어린 해리의 흔들림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트롤도 없고 볼드모트도 아직은 완전체가 아니며 주인공도 영웅이라기엔 너무 작다. 그래서인지 어릴 땐 그저 마법사들의 세계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내가 지금은 해리의 불안과 혼란에 더 마음이 간다.


특히 마지막 장면. 비밀의 방에서의 싸움을 끝낸 후 덤블도어가 해리에게 조용히 건네는 말이 있다.

“It is not our abiliti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It is our choices.”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건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

네이버영화 스틸컷

그 한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처음 들었을 땐 그저 멋진 문장이라 생각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약간 교훈적인데 막상 내 삶에선 별로 쓸 일이 없어 보였다. 현실은 선택보다 능력이 중요한 거 아닌가. 이력서를 봐도 그렇잖아. ‘선택 항목’보다 ‘능력 항목’이 훨씬 위에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편의점 도시락을 고르던 날부터였다. 그날도 퇴근길이었다. 배는 고픈데 뭔가 챙겨 먹긴 귀찮아서 결국 편의점으로 향했다. 도시락 코너 앞에 서자마자 멈췄다. 불고기 정식, 제육 덮밥, 김치볶음밥, 샐러드 도시락까지.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하나를 골랐는데 그게 바로 불고기 정식 도시락이었다.


집에 와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한 입 딱 먹었는데 왠지 제육이 더 땡겼다. 아, 선택 실패. 인생의 사소한 후회 1위, 편의점 도시락 선택.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순간의 선택이 나를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덜 매울 것 같은 걸 고르는 나. 속 편한 걸 우선하는 나. 늘 뭔가 아쉽지만 또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나. 누가 보면 웃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시락 하나 고르면서도 인생을 배운다. 참 별볼일 없는 방식으로, 천천히.


비슷한 일이 또 있다. 대학교 때 수업 중 발표를 맡았던 날이었다. 그날 나는 PPT를 만들었고 발표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 앞에 서니까 머리가 새하얘졌다. 말이 꼬이고 화면 넘기기도 엉망이었다. 친구들은 “괜찮아, 잘했어”라고 했지만 나만 알았다. 진짜 못했단 걸.


그날 집에 와서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되뇌었다. 다신 안 해. 발표? 나랑 안 맞아. 나는 뒤에서 자료 정리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발표를 피했고 발표 안 해도 되는 수업만 골라 들었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피했던 거다.

네이버영화 스틸컷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발표를 한 것 자체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 순간이었다. 잘하지 못했지만 무대 위에 서기로 선택했던 그 하루. 모든 게 꼬였지만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다음부터는 적어도 시도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 덜어졌다. 능력은 없었지만 그 순간 선택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카페에서 쓴 글이 날아갔던 날의 이야기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감성 충만하게 노트북을 켰다. 라떼 한 잔, 재즈 음악, 앞에 앉은 연인들, 창밖의 봄비. 이건 뭐, 글이 써지지 않으면 이상한 조건이었다. 두 시간 동안 몰입해서 글을 썼고 거의 마지막 문장까지 다 왔는데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배터리 방전. 저장은 안 했다.


그 순간 느꼈다. 아, 이건 진짜 끝났다. 속으로 ‘이게 다 내 능력 부족이다. 왜 자동 저장을 설정 안 했을까. 왜 집중력이 떨어지면 저장부터 안 했을까.’ 자책의 늪에 빠지려다 문득 생각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또 쓰지 뭐. 결국 나는 그날 다시 썼다. 완전히 똑같진 않았지만 오히려 두 번째 글이 더 낫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능력 있는 사람은 글을 날리지 않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 쓰는 사람이라는 걸. 글이 날아간 건 실수였지만 다시 쓴 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줬다.

네이버영화 스틸컷

우리는 크고 작은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능력 없는 사람이라 낙인찍는다. 그건 쉽다. 나는 원래 못해, 내가 해봤자 뭐 하면서 스스로를 한계 안에 가둔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 탓만 하며 살다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짜 후회하는 건 못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이다. 선택하지 않은 순간들이 쌓여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그리고 그런 하루가 반복되는 삶.


덤블도어의 말이 결국 그걸 말하는 거 아닐까. 능력이 우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선택이 우리를 만든다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발표에 서보기로. 글이 날아가도 다시 써보기로. 편의점 도시락 앞에서 괜히 고민해보기로. 그렇게 사소하고 웃긴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


나는 아직도 자주 망설이고 종종 후회하고 가끔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게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나는 계속 선택해보려 한다. 이왕이면 조금은 웃기고 조금은 찌질하고 조금은 멋있는 사람으로.


그러니까 오늘도 덤블도어의 말이 내 하루의 문장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건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조금 부족한 능력으로 다소 황당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의외로 꽤 괜찮은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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