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을 무너트리자

귀찮음의 부피

by 기억의 틈

나는 분리수거통을 따로 두지 않는다.


배송 온 택배 박스를 현관 앞에 두고

그 안에 비닐이며 종이박스, 플라스틱 용기를 하나둘씩 던져 넣는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나름의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박스가 자라기 시작할 때다.

어느 시기가 되면 택배가 몰려온다.

생필품, 간식, 옷 수많은 택배들이 줄줄이 도착하면서

박스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그리고 어느새.....

큰 만큼 쌓여간다.



그걸 보면 안다.

‘이건 이제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구나.’

하지만...... 나는 하지 않는다.


문 앞에 앉아 거대한 박스를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내일 하지, 뭐.”

다음 날도 같은 말.

“토요일에 몰아서 하면 되겠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면

이젠 박스를 넘어서 뭔가 문화재처럼 쌓인 분리수거의 탑이 된다.


그걸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해야 할 건 간단한데

눈앞에 보이는 그 크기가 괜히 나를 작게 만든다.


귀찮음의 정체는 행동이 아니라 압도당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막상 날 잡고 분리수거를 하면 10분도 안 걸린다.

진짜다.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슬슬 나눠 담고 집 앞 분리수거함에 툭툭 던져 넣으면 끝이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을

나는 대체 왜 그렇게 오래 미뤘을까?


게으름?

아니다. 난 꽤 부지런한 사람이다.


완벽주의?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냥 일의 부피가 나를 압도한 것 같다.

쌓여 있는 것 자체가 나를 짓눌렀달까.


그래서 나는 오늘

드디어 택배 박스의 탑을 무너뜨렸다.



이 작은 승리에 아무도 박수를 쳐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오늘의 나는

내 키를 넘는 귀찮음을 이겨낸 사람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삶엔 이 탑 말고도 여러 종류의 탑이 존재한다.


미뤄둔 빨래

정리 안 한 폴더

답장 안 한 메시지

한참 전부터 열어보지 않은 택배 상자까지.


그중 하나쯤은

내일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내가 무너뜨려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대부분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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