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 vs 최후의 인간
내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최초의 인간과 최후의 인간, 이 중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늘 나를 멈춰 세운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 혹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린다.
이랑의 <신의 놀이>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이 첫 구절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 같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믿음도 방향도 잃은 채 하루를 버티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세상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좋은 이야기’를 믿는 내 신념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나는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작은 글 한 편, 낡은 일기장 한 줄, 누군가에게 건넨 짧은 말 한마디.
그 모든 게 아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날에도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만의 ‘신의 놀이’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려는 거창한 힘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마음에 향기를 남길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만드는 일.
노래 속 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이야기는 향기를 품고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죠.”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절망 속에서도 글을 쓰던 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좋은 이야기는 완벽해서 좋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를 통과해 나온 향기를 품기 때문에 좋은 것임을.
요즘 카페에 가면 늘 같은 노트북 불빛,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도 각자의 ‘신의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삶을 기록하고 누군가는 관계를 이어가며
모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작은 신들처럼.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최초의 인간이 되고 싶다.
무언가를 완성하는 최후의 인간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인간.
끝을 기다리기보다 오늘의 한 장면을 향기로 남길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언젠가 그 향기가 누군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신의 놀이 속에서 충분히 살아 있었던 인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