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귤, 한 번의 우연
며칠 전 회사 동료가 귤 몇 알을 나눠줬다. 책상에 놓인 귤을 집어 들고 무심코 껍질을 벗기는데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향에 마음이 순간 멈췄다. 아무 준비도 없이 찾아온 냄새 하나가 작은 문을 여는 것처럼 훅 하고 과거를 불러오는 경험. 그게 바로 재주소년의 <귤>이 말하는 순간이었다.
동료가 나눠 준 귤 하나를 계기로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아주 단순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장면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작은 우연 하나가 잠자고 있던 계절을 통째로 데려오는 힘이 있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 나는 제주도에서 열린 마라톤에 참가했다. 인생에서 먹을 귤을 그때 다 먹었다고 해도 될 만큼 잠들기 전에도 귤, 아침에도 귤, 달리면서도...... 귤이었다. 뛸 힘이 부족해서 귤에 의지했고 추운 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달달한 제주 감귤이 녹여주곤 했다.
마라톤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가자 동료들이 하나같이 "귤 먹었어요?"라고 물었다. 손에서 그리고 내 말투 어딘가에서까지 귤 향이 스며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귤과 바람과 부족한 체력 사이에서 어느 계절을 통과하던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 동료가 건넨 귤 하나가 작년 겨울 제주 바람과 마라톤 장면을 한꺼번에 데려왔다. 그때의 고민, 그때의 감정, 그때 나를 버티게 했던 작은 귤 맛까지도.
생각해 보면 내 삶은 이런 식의 우연들로 이루어져 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문장 하나가 진로를 바꾸게 한 적이 있었고, 무심코 본 광고 문구 하나가 몇 주를 괴롭히던 마음을 단숨에 가볍게 한 적도 있다. 어떤 날은 스치듯 들은 노래 한 곡이 하루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했다.
재주소년의 <귤>은 그 우연의 작동 방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노래다. 작은 냄새 하나가, 귤껍질의 질감 하나가, 지난겨울의 감정과 고민을 다시 꺼내오듯 삶의 중요한 순간들 역시 항상 그런 식으로 문을 두드린다는 걸.
노래는 이렇게 말한다.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는 얼마나 고민했었나." 마치 귤 향에 휘둘리던 내 지난 계절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제 조금은 이해한다. 내 삶을 움직인 건 내가 세워둔 계획보다 후식처럼 다가온 작은 우연들이었다는 걸. 회사 동료가 건넨 귤 한 알도 결국 내 안에서 잊고 있던 계절을 다시 꺼내주었으니까.
그래서 이 노래를 잠시 멈추고 싶은 사람에게, 잠시 다시 웃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작은 우연의 힘을 믿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고 싶다. 귤처럼, 조용히 당신의 계절을 열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