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면 생각나는 비릿한 엄마표 콩나물 김칫국 이야기
누구나 아플 때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감기나 몸살이 찾아올 때면 나는 늘 엄마가 끓여주던 멸치 비린내 폴폴 나던 콩나물 김칫국이 생각난다.
뽀빠이의 시금치처럼 엄마표 콩나물 김칫국 한 그릇이면 감기와 몸살쯤 거뜬하게 이길 것 같다.
파란 바다와 눈부신 태양이 먼저 생각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도 가을이 왔다고 집 공기가 썰렁해지면 내내 어깨를 웅크리고 지내는 나는 새해가 시작되고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면 어깨를 펴고 살만해지는 따스한 5월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의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오래 머물렀고 공식적으로 봄이 왔다는 절기가 되었음에도 겨울이 떠나지를 못했는지 봄이 다 가도록 오락가락하는 비와 을씨년스러운 흐린 날씨가 지속되었다. 머뭇거린 겨울 덕분인지, 겨울을 놓아주지 못하는 봄의 미련 때문인지 결국 5월은 따뜻한 바람이 아닌 독한 감기로 나를 찾아왔다.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는데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내 목과 어깨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등교와 출근을 위해 분주한 아침을 시작하기 전, 얼른 따끈한 소금물로 가글을 한 뒤 생강차를 끓여서 훌훌 마셨다. 출근길에 뜨거운 생강차를 보온병에 담아 집을 나섰건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나는 이미 내 몸이 독감의 지배 아래에 놓여 몸살과 열기운에 휩싸이고 있음을 체감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차를 담은 커다란 컵을 들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웠다. 까무룩 하게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어디선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콩나물이랑 김치 넣고 시원하게 콩나물 김칫국 좀 끓여.”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감기나 몸살 기운이 느껴지면 이불속으로 들어가면서 엄마에게 저녁 반찬으로 콩나물 김칫국을 주문하곤 했다. 나는 아빠의 주문에 이어 부엌에서 들려올 엄마의 외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서 콩나물 좀 사와라.”
그래서 아빠의 주문을 듣자마자 TV를 끄고 잽싸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숨을 죽인 채 열심히 숙제를 하는 척했다. 엄마가 누구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심부름에 당첨되지 않으면 되니까.
“얘들이 어딜 갔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여동생은 한참 밖에서 놀고 있었고 툭하면 열외가 되는 막내 동생은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으나 이 날도 열외가 되었다. 곧 방문이 벌컥 열렸고 1000원짜리를 내밀면서 엄마가 말했다.
“소풍아, 얼른 가서 콩나물 500원어치만 사와라.”
그렇게 꼼수를 부렸음에도 그날도 콩나물 심부름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콩나물을 사러 가는 것도 싫었지만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멸치 비린내와 비릿한 콩나물 냄새가 뒤섞인 빨간 콩나물 김칫국이 더 싫었다.
내 도시락 반찬이 주로 배추김치 볶음이나 알타리 김치 볶음이던 시절이었다. 돼지고기보다 김치가 더 많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도 가끔이나 먹을 수 있었고 김치만 잔뜩 들어간 김치전, 심지어 배추가 들어간 된장국에 김치 반찬이 밥상을 점령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콩나물 김칫국에 배추김치나 알타리 김치, 때에 따라선 파김치가 저녁 반찬이라는 사실은 내 손에 들린 까만 비닐봉지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콩나물을 미워하게끔 만들었다. 까만 껍질이 모자처럼 노란 머리끝에 매달린 까만 비닐봉지 속의 길쭉하기만 한 콩나물과 달리 기름기가 반지르르 도는 튀김이나 김칫국과 같은 빨간색이어도 맛은 천만 배 좋은 어묵이 가득한 떡볶이 옆을 스치면서 나는 콩나물 사고 남은 주머니 속의 은색 동전을 조물딱거리 곤 했다.
내가 고문하듯이 김칫국 속의 콩나물의 머리를 젓가락으로 똑똑 떼면서 밥을 깨작거리는 사이 아빠는 엄마가 국그릇 가득 퍼준 콩나물 김칫국에 밥을 말아서 금세 한 그릇을 후루룩 비웠다.
“어, 맛있다. 감기 다 나가겠네.”
이마의 땀을 닦으며 김칫국을 두 그릇이나 먹은 아빠는 엄마가 끓여온 숭늉까지 훌훌 비우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맛있다는 아빠의 말에 콩나물 김칫국을 끓인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밥상을 치웠다. 콩나물 한 봉지만 사면 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값싸고 쉬운 반찬인 데다가 엄마 말에 의하면 커다란 멸치를 듬뿍 넣고 끓여 영양도 풍부한 멸치 비린내가 풀풀 나는 엄마표 콩나물 김칫국은 아빠가 아플 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밥상에 수시로 올라오는 우리 집 단골 메뉴였다.
"어허~ 감기 뚝 떨어지겠네" 후루룩 콩나물 김칫국을 마시던 아빠도
값싸고 영양 많다고 수시로 콩나물 김칫국을 끓여냈던 엄마도
멸치 비린내와 콩나물의 비릿한 맛이 뒤섞인 빠알간 콩나물 김칫국도 못마땅했던
오래전 어느 저녁 식사 시간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새신부로서 제대로 된 주부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동네 마트에서 다른 콩나물보다 1.5배는 비싼 유기농 콩나물을 사서 콩나물 김칫국을 끓였다. 내가 먹어봐도 뭔가 멸치국물과 콩나물과 김치 맛이 제각각인 듯 느껴지는 콩나물 김칫국을 맛있는 양 호로록 떠먹으면서 남편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맛있어? 맛있지? 아빠가 이거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진다고 하셨어.”
나는 엄마의 영양 만점 콩나물 김칫국에 아빠 감기가 뚝 떨어졌다고 설명하며 신이 나서 내 김칫국을 자화자찬했다. 워낙 식욕이 좋고 반찬투정과는 거리가 먼 겸손한 입맛의 고마운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신랑이 아프다고 새신부가 손수 장을 봐다가 끓여준 멸치맛 따로 콩나물 맛 따로인 김칫국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 엄마가 끓여준 멸치 냄새 가득한 콩나물 김칫국 먹고 싶다.”
열기운에 잠이 들었던 나는 바짝 마른 입으로 중얼거리며 잠의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린 시절 먹었던 멸치 비린내와 콩나물의 비릿한 냄새가 섞인 뜨끈한 빨간 국물의 엄마표 콩나물 김칫국을 떠올리자 열기로 마른 입안에 침이 고였다.
댕댕 도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무거운 몸을 비적 거려 부엌으로 들어서서 냄비에 물을 담고 냉장고를 열었다. 까만 모자가 대롱거리는 콩나물 한 줌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그 얄미웠던 콩나물은 냉장고 안에 없었다. 콩나물 대신 무엇을 넣을까 싶어 냉장고를 뒤적이다 몇 조각 남은 어묵을 발견한 나는 김치 어묵탕을 끓이기로 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콧물이 줄줄 났지만 뜨끈하고 비릿한 김칫국을 먹어야만 나을 것 같아서 불멸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국을 끓여냈다. 콩나물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멸치 육수를 내고 엄마가 보내준 김장김치를 듬뿍 넣은 김치 어묵탕은 이십 년 살림 경력 덕분인지 제법 그럴싸한 맛이 났다.
그 날 저녁, 감기에 비실거리면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직접 끓인 김치 어묵탕에 정신없이 밥을 말아 후루룩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두 아이가 조잘거렸다.
“엄마, 이거 김칫국이야, 어묵국이야?”
“김치 어묵탕에 어묵은 별로 없고 김치가 더 많아.”
아픈 엄마가 애써서 준비한 음식에 대해 아이들이 투덜대는 것에 발끈 화가 났다. 먹지 말라고 국그릇을 치우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다스리며 한 마디 하려는데 두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의 상태를 눈치챈 남편이 얼른 아이들에게 한 마디 했다.
“엄마가 아픈대도 저녁 준비한 것에 감사하며 먹어. 김치 어묵탕인진 어묵 김칫국인지, 맛만 있구먼.”
남편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하얀 알약을 삼킨 후 빙빙 도는 머리와 으슬거리는 몸을 침대에 뉘었다. 김칫국 같은 김치 어묵탕에 밥 한 그릇을 가득 말아먹어서 배가 부른데도 나는 여전히 허기가 느껴졌다.
‘아, 엄마가 끓여준 콩나물 김칫국 먹고 싶다. 그거 한 그릇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질 거 같은데…….’
약기운인지 잠 기운인지 모를 무언가에 이끌려 내 몸이 의식과 분리되는 기분과 함께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내 의식의 끝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저만치 멀어지면서 점점 조그마해지는 생각의 문틈으로 부엌을 향해 외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콩나물 김칫국 끓여. 소풍이 감기 걸렸대. 얼른 콩나물이랑 김치 듬뿍 넣고 얼큰한 콩나물 김칫국 끓여.”
그 작은 틈까지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 벌게진 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 곧 뜨끈뜨끈한 콩나물 김칫국 한 그릇 먹을 수 있겠다.’
잠이 깊어졌다 얕아지는 사이에서 약기운에 열이 내리락 말락 하는 것을 느끼며 엄마가 끓이는 콩나물 김칫국이 완성되기를 밤새 기다렸다.
아빠 : 감기에는 콩나물 김칫국이지.
엄마 : 우리 딸 많이 먹고 감기 뚝!
빨간 국물 속 콩나물과 김치 : 맛있냐? 맛있지? ㅋㅋㅋ
나 : 아~ 이 개운하고 얼큰한 국물. 너무 맛있어.
며칠 뒤, 몹시도 괴롭히던 감기와 몸살 기운에서 회복한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기는 거의 떠났건만 엄마의 콩나물 김칫국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말했다.
"엄마, 나 엄마가 끓인 콩나물 김칫국 엄청 먹고 싶어."
"소풍이, 너 감기 걸렸냐?"
걱정할까 봐 감기가 나은 후에 전화를 한 것인데 엄마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조금 아팠는데 다 나았다고 둘러댔지만 엄마는 태평양을 건너와 커다란 멸치를 듬뿍 넣은 얼큰하고 개운한 콩나물 김칫국을 직접 끓여주지 못하는 것을 전화를 끊을 때까지 서운해하였다.
가끔 부모님이나 한국이 몹시 그리울 때면 어릴 때는 그렇게도 미워했던 콩나물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콩나물을 다듬고 멸치 육수를 내어 끓인 빨간 콩나물 김칫국의 얼큰하고 비릿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우면 "콩나물이랑 김치 넣고 시원하게 콩나물 김칫국 좀 끓여.”라는 아빠의 목소리와 함께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 날 저녁, 그 얼큰하고 감칠맛 나는 개운한 콩나물 김칫국에 나와 남편은 밥을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운다. 맞은편에 앉은 두 아이가 젓가락으로 콩나물과 김치 몇 조각 건져 먹고 남긴 국그릇을 치우노라면 콩나물 김칫국을 구박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아직 우리 아이들은 이 얼큰하고 개운한 콩나물 김칫국의 참맛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아이들이 지금의 나 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나 감기 기운에 시달리는 순간 이 뜨끈한 국물을 떠올릴 것이다. 호리호리 볼품없는 콩나물이 가득한 얼큰하고 개운한 이 빨간 김칫국 한 그릇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