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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Jun 30. 2020

미국에 살지만 한국어만 잘하는 한국인

한국어를 영어보다 훨씬 잘하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야기


미국에는 세 가지 종류의 한국사람이 있다.

1. 한국어만 유창한 한국사람 2. 영어만 유창한 한국사람 3.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유창한 한국사람.

한국어 교사가 이야기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



한국어의 구사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에는 세 가지 종류의 한국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1. 미국에 살지만 한국어를 영어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

2. 한국인의 뿌리를 가졌지만 한국어는 서툴고 영어만 유창한 사람들 

3.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나는 이 중에 1번에 속한다. 그리고 아마도 1번 한국인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1번 한국인들은 영어보다 한국어를 월등하게 잘하는 사람으로 미국에 살지만 여전히 영어가 서툰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해본 적이 없고 혀와 머리가 굳은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사람들로 나를 포함하여 내 지인들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을 다니고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도 유창한 영어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절대로 영어를 한국어만큼 잘할 수 없다. 

물론 이들 중에도 피나는 노력이나 특별한 영어의 재능을 통해 영어를 퍽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1번 한국인들은 오래 미국에 살았어도, 노력을 통해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영어를 구사함에도 그들의 영어문장과 발음에서는 한국인의 티가 팍팍 난다. 문장이나 발음에서 어쩔 수 없는 원어민 영어와의 거리가 느껴진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지만 실제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내 영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여전히 발음도 억양도 어색하다. 이들은 1번 한국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하고 2번 한국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안타까운 아마 1과 2 사이 어디쯤 1.2번 한국인이나 1.3번 한국인으로 보아줘야 될 거 같다.




1번 한국인들의 특징


1. 지인 앞 영어 울렁증 

1번 한국인들의 첫 번째 특징은 '지인 앞 영어 울렁증'이다. 1번 한국인들은 미국인 앞에서 혼자 영어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법이 틀리거나 발음이 엉터리여도 어떻게든 서툰 영어로 필요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한국인 특히 자신보다 영어를 쪼금 더 잘할 거 같다고 추정되는 한국인 앞에서는 영어로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나와 내 지인들도 같이 커피숍이나 식당에 가면 서로 주문하라고 미룬다. 상대방이 영어를 더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상대방에게 영어를 사용할 기회를 양보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부족한 영어를 다른 지인 앞에서 들키기 싫은 속내가 있다. 

나 혼자서 미국인의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부끄러운 것을 무릅쓰고 여러 번 다시 말해달라며 부탁을 해서 미국인들의 말을 대강이라도 이해해낸다. 그러나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미국인들의 대화를 들을 때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상대방에게 그 미국인이 뭐하고 했는지 대수롭지 않은 척 물어본다. 미국인에게 다시 물어보기도 민망하고 기를 쓰며 알아들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인에게 보이기도 쑥스러운 것이다. 


2. 영어 단어 섞어증

미국에서 오래 산 1번 한국인들의 다른 특징은 '영어 단어 섞어증'이다. 자신 있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중에 무의식 중에 또는 의도적으로 특정 영어 단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여전히 영어를 잘 못하지만 미국에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습득되거나 또는 어떤 계기를 통해 학습된 영어 단어 목록이 생긴다. 그중에는 영어 단어로 더 표현이 용이한 단어들도 있고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입에 붙은 단어도 있다. 1번 한국인들은 능숙한 한국어 문장 속에 그런 영어단어를 섞어 쓴다. 

처음 미국에 와서 영어를 그다지 잘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화 중에 종종 영어 단어를 섞어서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국에 오래 살았다고 잘난 척을 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어를 영어보다 훨씬 잘하는 내가 영어 단어가 섞인 한국어로 수다를 떠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하였다. 내가 대단한 영어 단어 암기왕인 척하려던 것도, 영어 실력을 자랑하려던 것도 아닌데 무의식 중에 영어단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제야 1번 한국인들이 한국어에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이 잘난 척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저 한국어로 표현하기에 애매하고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운데 미국에서는 일상에서 다반사로 사용되는 그런 단어는 영어로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오래 산 1번 한국인들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한국어에 섞어서 사용하는 영어단어의 목록이 늘어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어떤 영어 단어 섞어증을 가진 1번 한국인들 중에는 자신의 미국 생활의 연륜과 영어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극히 의도적으로 한국어에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사람도 있다. 영어의 유창성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자신이 영어와 보낸 세월에 대한 자부심으로 굳이 영어단어가 필요 없음에도 영어 단어를 한국어 문장에 섞어 쓰기도 하고 영어반 한국어 반의 문장을 구사하기도 한다.


3. 한국어도 영어도 둘 다 안돼증

1번 한국인들은 간혹 '한국어도 영어도 둘 다 안돼증'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좀 우스운 상황이기도 한데 이들은 한국어를 잊을 만큼 영어를 잘하게 된 것도 아니면서 영어도 안 되고 한국어도 안 되는 이상한 증상을 보인다. 실제로 나 또한 대화 중에 또는 글을 쓰는 중에 한국어 단어가 머릿속을 뱅뱅 돌면서 생각이 안나는 때가 있다. 주변의 1번 한국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나이와 기억력을 탓하기도 했다. 절대로 영어가 한국어를 넘어설 수 없는 월등한 한국어 구사력을 가졌으나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사이 그 수준의 영어 단어는 모르는데 그에 해당하는 한국어 단어가 가물가물해지는 증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영어는 늘지 않는데 한국어가 퇴보되는 서글픈 증상이다. 여전히 한국어가 훨씬 능숙하지만 영어권인 나라에 오래 살다 보니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한국어 단어가 흐릿해지고 영어 단어는 생각이 나지 않거나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1번 한국인들은 처음에 미국에 오면 3번 한국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한다. 열의와 재능으로 1.2번이나 1.3번 한국인이 되는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1번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한 열정이 소진되거나 자신의 영어 처지를 자각하게 되면 영어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어 수업을 포기하거나 영어 공부에 대강 발을 걸친 채 1번 한국인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들은 미국에 살지만 그들의 생활은 한국에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은 한국 마켓에 가서 한국 반찬거리를 산다. 자기와 비슷한 1번 한국인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그들과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떤다. 한국 드라마와 한국영화를 즐겨보고 한국 뉴스를 통해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한국 소식을 더 잘 안다. 주변에 새로 문을 연 한국 식당을 찾아다니고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며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과 치과에 다닌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과 같은 1번 한국인이 되기를 절대 원치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자녀를 2번 한국인이나 3번 한국인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이 1번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한국인스러운 삶을 고집하면서도 미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글 쓴 후 떠오른 단상


오래전 한국에서 한국어에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쓰는 사람을 보면 뭔가 더 학식이 있어 보이고 왠지 교양이 있어 보인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약간 영어 발음이 섞인 한국어를 하다가 "음~"하고 망설인 후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한국어를 이어가는 것을 보면 어쩐지 지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나와 내 지인들처럼 1번 한국인이면서 '영어 단어 섞어증'이나 '한국어도 영어도 둘 다 안돼증'을 가진 이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외국물을 먹었다며 내심 드러내고 싶은 과시욕을 보여준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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