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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Jul 03. 2020

한국어가 서툰 미국의 한쿡인들

어쩌면 한국어가 배우고 싶어진  미국의 한쿡인들 이야기


미국에는 세 가지 종류의 한국사람이 있다.

1. 한국어만 유창한 한국사람 2. 영어만 유창한 한국사람 3.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유창한 한국사람.

한국어 교사가 이야기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



내가 속한 1번 범주의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가 성인이 된 후 미국에 온 이들로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가 그들의 한국어보다 아니 한국어만큼 유창해질 수 없다. 반대로 2번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 미국에 와서 생긴 건 한국인 같지만 미국인처럼 영어를 구사한다. 한국어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는 사람들로 영어는 매우 유창한데 한국어가 몹시 서툴다. 

영어를 한국어보다 잘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은 한국사람이고 부모의 영향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다소 한국적 정서를 가졌지만 본인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사고방식이 매우 미국적이다. 이들 중에는 한국인들의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일전에 한국인이라고 확신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가 그 사람이 어색한 한국어로 더듬거리거나 너무 유창한 영어로 대꾸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다. 이들의 한국어 발음은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한국어 문장에 오류가 많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부모들이 한국어를 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다간 난처한 경우를 겪게 될 수 있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알아듣는 경우는 있기 때문이다.




2번 한국인들의 특징


1. 부모와 의사불통 증후군

오래전 미국에 이민 온 한국 부모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면 꾸중을 하면서 자녀의 영어가 빨리 트이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자녀는 곧 영어를 미국인처럼 하게 되는 대신 빠르게 한국어를 잊어버렸다. 이런 경우 부모는 한국어로 자녀는 영어로 대화를 하게 되면서 점차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가 불편해져서 서로 대화를 기피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영어를 열심히 배운 부모들도 있고 자녀들이 한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해도 알아듣기는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소통은 가능하지만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한국어 센터에서 수업을 들었던 30대의 정신 상담사 L 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국학교에 잠깐 다니다 그만둔 뒤 점차 한국어를 잊어버렸다고 했다. 자신이 부모의 한국어를 대강 알아듣고 부모가 자기 영어를 대충 알아듣지만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특히 얼굴을 볼 수 없는 부모와의 전화 통화는 몹시 불편하고 언어도 사고방식도 다른 부모와 함께 있는 게 싫어서 전화통화나 부모의 집 방문을 피하고 있었다. 뒤늦게 부모와 다른 한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러 왔지만 한국어가 어렵다며 어렸을 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을 후회했다.


2.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 무시증 

영어만 능숙한 한국인들은 한국어만 능숙한 한국인들을 은근히, 가끔은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 눈에는 미국에 살면서 한국어만 하고 한국스러운 삶을 영위하려는 1번 한국인들이 다소 한심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대학에 가면 두 가지 한국인 집단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거나 한국어가 서툰 한국인 집단과 한국어가 유창한 한국인 집단. 서로의 한국어와 영어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서로의 힘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상대가 영어를 못하는 것에, 상대가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서로를 무시하고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외국학생들이 그런 한국 학생들의 이질적인 집단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미국 대학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주변의 경험자들의 이야기에 의한 것이지만 많은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임을 가늠할 수 있다.

한국인 교회나 성당에 가도 한국어가 서툰 아이들과 한국어가 능숙한 아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적응하지 못해 이 교회 저 성당을 방황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한국어가 서툰 아이들은 한국어가 능숙한 아이들 앞에서 자신들의 서툰 한국어를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더 영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영어를 못 따라오는 아이들을 은근히 무시한다. 한국어가 영어보다 유창한 아이들은 자신들 앞에서 일부러 더 영어로, 게다가 빠르게 영어로 떠드는 친구들이 불편하다. 속된 말로 서로의 영어와 한국어에 대해 쫄기 싫은 것이다.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 무시증'을 가진 사람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 내면에는 자신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크고 작은 열등감과 한국어를 잘하는 아이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부러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단계를 넘어서서 무시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한국어에 대한 갈증을 자각하고 나면 이들에게는 '한국어도 필요하구나 증'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3. 한국어도 필요하구나 증

십 대와 이십 대에는 부모의 어설픈 영어를 무시하면서 의사불통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철이 들어 한국어의 필요성을 느끼고 뒤늦게 한국어를 배우는 2번 한국인들이 있다. 미국에 살지만 한국인이나 한국 사회와 단절하여 살 수 없다 보니 직업상 또는 인간관계 상 한국어가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 한국인으로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도 한다. 중국인 남편과 결혼하고 두 아이를 둔 우리 반 한국인 학생 K 씨는 한국인 사장이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동료들이 한국어를 제법 잘하는 데다가 한국 거래처와 통화할 때 자기가 한국어를 못하니 몹시 불편하고 민망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어 필요하구나 증'을 가진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한으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부모들이 있다. 영어가 유창하기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에서 사는데 불편함은 없지만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가진 사람으로 한국인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해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쉽고 답답한 심정을 가지며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한국어를 못해서 안타까웠던 후회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본인이 한국어를 못하니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종교기관에 소속되지 못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그 종교기관 산하의 한국학교에 보내지도 못한다.

내가 일하는 한국어 센터에는 한국어를 못하는 부모들의 2세나 3세 자녀를 위한 한국어 수업이 있다. 몇몇 2번 한국인 부모들의 요청에 의해 수업을 열였는데 점점 소문이 나서 학생수가 늘고 있다. 가끔 한국어 센터에 오는 학생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 반에는 부모가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밖에 못하는 가정의 자녀들도 있고 한쪽 부모만 한국인인 혼혈아나 고려인 조부모의 피를 받은 학생들도 있다.  

사실 한국어 수업에 오는 아이들은 놀고 싶은 토요일에 한국어 센터에 수업하러 오는 것을 마냥 즐거워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한국어는 발음도 어렵고 배우는 재미도 없다. 게다가 한국어 문법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복잡하니 토요일마다 수업에 오는 것에 대해 아이들은 투덜댈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못하는 부모들에게는 자신이 싫어서 또는 기회가 없어서 배우지 못한 한국어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자녀들을 열심히 수업에 데리고 온다. 어떤 학부모는 토요일 오후에 아이의 두 시간짜리 한국어 수업을 위해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하며 아이를 센터에 데려온다. 아이가 결석하는 경우에는 따로 과제를 받으러 오는 열성적인 부모도 있다. '한국어도 필요하구나 증'을 가진 2번 한국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은 자신과 다르게 한국어도 영어처럼 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어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2번 한국인이 될 것이냐 3번 한국인이 될 것이냐는 부모의 관심과 조력에 따라 결정된다. 똑같이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왔어도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어를 하더라도 외국인처럼 어딘지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쿡인이 있는가 하면 영어는 영어답게 한국어는 한국어답게 하는 한국인도 있다. 예전에 미국에 온 한국 부모들이 자녀들의 영어에만 신경을 쓰던 것과 달리 요즘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의 한국어에도 관심이 많다. 주말에 한국학교에 보내고 일부러 한국 TV 프로그램도 보여주며 자녀들이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 한국어 교사로서 그런 한국인 부모들의 생각과 수고에 감사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 가운데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학교의 학생 비율은 피라미드 형태다. 유치반과 초등 저학년 때는 교실을 가득 채우던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쯤 가면 수가 줄기 시작해 소수의 중, 고등학생만 남는다. 자신들의 생각이 분명 해지는 십 대가 되면 아이들이 한국학교를 떠나는 것이다. 더 이상 부모가 억지로 한국학교에 보낼 수 없다. 아이들은 학교 생활도 바쁜 데다 집에서나 한국학교에서 밖에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를 굳이 시간 내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부모의 관심과 조력 없이 아이들이 한국어를 유지하거나 한국어 실력을 기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한국에 살던 때 간혹 한국어를 영어처럼 이상하게 굴려가며 발음하거나 외국어의 억양이 섞인 발음으로 다소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국 사람을 보면 왠지 그 사람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고 외국물 좀 먹은 듯한 그들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영어는 영어답게 한국어는 한국어답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상황과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필요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나라에 살든 자신의 뿌리와 부모의 나라인 한국의 언어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인생에 결정타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람을 맞으며 달릴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작은 돛을 달아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영어 때문에 서러웠던 1번 한국인이든 또는 한국어가 아쉽지 않았던 2번이나 3번 한국인이든 외국에서 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아이가 한쿡인이 아니라 한국인이 되도록, 아이가 타국에서 살지라도 한국어의 돛을 달 수 있도록 아이의 한국어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한국어 교사로서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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