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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Dec 09. 2019

이름을 불러주세요. 우리는 꽃이 됩니다.

이름으로 불러주는 미국에서 꽃이 되고 있는 누구 엄마 이야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에선가 국어 시간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배웠다.

대학입시를 위한 수업답게 연과 행의 구절을 분석하고 화자와 글의 소재에 대해 파헤치면서.

시의 전문을 다 외우지는 못해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시를 교실에서  배우던 시절,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꽃이 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구가 좋아서 자꾸 읊조리곤 했다.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이름이 부르는 것의 의미를 삼십 년도 더 지나 미국이란 나라에 살면서 배우고 있다.    




"Hi, Janet!"

동네 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아들 친구 엄마다.

"Hi, Amanda. How are you?"

잠시 수다를 떤 뒤, 우리는 각자 갈길을 간다.

"Bye, Amanda."

"See you, Janet"

아만다는 대학생인 큰 아들이 있는 나보다 10살은 많은 남미 아줌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형제들 간에도 이름을 부르고 삼촌이나 이모도 이름으로 부른다.

직장에서도 서로의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사람의 성(Last Name)에 Mr. 나 Mrs. 같은 호칭을 붙여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름(First Name)을 부른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그것이 몹시 어색했다.

ESL 수업을 갔는데 내 또래 거나 나보다 어린 학생들이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백인 할머니나 할아버지 선생님들에게 "Michelle" 또는 " Matthew"하며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에서는 담임과 친한 학부모들은 서로 이름을 불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Mrs. Johnson이라고 선생님을 불렀지만 말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친구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서로 자유롭게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낯설고 힘들었던 것은 알게 된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름을 몰라도 “선생님”이라거나 “**엄마”라고 하면 되는데 미국에서는 학교 선생님이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teacher”이나 아이 이름이 Tommy 하고 해서 “Tommy’s mom”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재능이 없는 데다가 한국에서의 직함이나 호칭 또는 아이 이름으로 부모를 부르는 문화에 익숙했던 나에게 사람들의 이름 그것도 영어로, 게다가 가끔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한 이름, Alma라든가 Biljana 같은 이름을 기억하고 제대로 부르는 일은 어려운 도전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를 헷갈리게 한 것은 내가 리스트에서 보고 알고 있는 이름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였다. 

미국인들의 좀 우습고 독특한 문화이기도 한데 원래 이름이 엘리자베스인데 엘리라고 부른다던지 본명은 잭슨인데 존이라고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본명과 닉네임이 전혀 달라서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보면 그네들도 모른다며 그냥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에 와서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그들의 문화에 적응하는 동안, 기억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수백 개의 사람 얼굴과 사람 이름을 짝짓기 하는 것 같은 과정이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곤 했다.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만나면 서로 이름을 물어 상대방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는다.

그럴 때면 한 번 이름을 들으면 기억하고 두 번째 만나면 거의 실수 없이 이름을 부르는 미국인들의 이름 기억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발음이 어려운 낯선 경우에는 다시 만났을 때마다 물어봐서 꼭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볼 때면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그네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그네들에게는 당연한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혀도 안 굴러가는데 미국인들의 꼬부랑거리는 이름을 외워서 불러야 하고, 이름이 기억이 안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끙끙거리는 낯설고 어색한 과정이 힘들었다.

그러나 조금씩 적응을 하고 나니, 이름을 부르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후 나는 "* 선생"으로, 결혼한 뒤에는 "**처"로, 아이를 낳은 후에는 "**엄마" 또는 "**에미"로 불렸다.

나를 '누군가의 사람'으로 알았던 어떤 이들은 끝까지 내 얼굴은 알아도 이름을 알지 못했고, 나 또한 그들을 '누군가의 사람'으로 기억하며 그들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멀어졌다.

나를 계속 내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들은 오래된 친구들과 내 부모님 뿐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한국 이름의 발음이 어려워서 ESL 수업에 가면서 만든 영어 이름을 대부분의 경우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들 나를 그 이름으로 기억하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나를 '누군가의 사람'이 아닌 오롯이 나로서 대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사람'이었던 사슬에서 벗어나 내가 나로 보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이와 서열과 상관없는  미국인의 이름 부르기에는 묘한 자유로움과 특별한 친밀감이 존재한다.


내 주변에서 나를 "**엄마"라고 부르거나 "언니"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곳에서 만난 한국 학부모들 뿐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고 이름을 알아도 서로를 미국인들처럼 "영숙", "미진"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나이에 얽매인 문화적 속박이나 사람을 개개의 인격체가 아닌 집단의 일원으로 보는 관습적 구속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인간관계 리스트에 속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들을 내 리스트에 넣는 방법이기도 하다.

서로의 이름을 묻기 전에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하나의 몸짓 같은 존재였지만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쓰기 전에 이미 어떤 나라 사람들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사람들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보다.

물론 문학적으로 보면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내가 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내가 알게 된 이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시에서 의미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고 심지어 내 인간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그의 향기와 빛깔을 지닌 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꽃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미국에 와서 나는 다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군가의 사람'이 아닌 나로 인식하고 불러주는 기쁨.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고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자유로움. 

그리고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사람과 사람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의미.

그런 것을 아는 내 향기와 빛깔을 지닌 꽃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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