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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Dec 17. 2019

외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 반갑기보다 불편한 것은...

가끔은 의사불통의 자유로움이 좋다는 극히 사적인 생각에 대한 변명

의도치 않게 누군가 내 말을 들고 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말은 저절로 귀에 들어온다.

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곳에 가면 내가 떠드는 말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자유로워진다.  




미국에서 팔 년이라는 시간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이 곳이 내가 사는 터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겪은 많은 불편함들 속에 가끔 좋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의사불통이다.


한국에 살 때는 마음에 거리끼거나 싫은 것이 있어도 밖에서는 내 기분이나 느낌을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주변에서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내 표현의 의미를 다 이해하는 데다가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다. 의사소통이 잘되니 삶은 편하고 필요한 것을 처리하는데 망설일 일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적당한 표현을 골라서 말을 하며 살았다. 특히 버스나 기차 또는 식당 같이 옆에서 누군가 내 말을 듣기 쉬운 곳에서 전화 통화를 할 때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삼가곤 했다.


그런데 남의 나라 미국에서는 영어가 서툴러 생활에 불편함은 있지만 미국인들은 못 알아듣는 한국어에 능숙한 삶이 주는, 하고 싶은 말을 생각 없이 뱉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거리에서나 마켓에서 아이들이나 남편과 한국어로 편하게 이야기해도 주변에서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사 불통이 가끔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장을 볼 때나 커피숍에서 마음껏 한국어로 전화 통화를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들을 일이 없다는 것이, 식당의 주문한 음식 앞에서 또는 가게의 물건을 둘러보면서 우리끼리 한국어로 속내를 드러내며 투덜거려도 직원들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묘한 자유로움을 준다.


그렇게 맘 놓고 한국어로 이러쿵 저러쿵 하다가 문득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려오면 움찔하며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반가워서 아니라 방금 내가 한 말을 누군가 알아들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내가 한 말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이지만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사는 지역에 살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입을 조심하게 된다. 게다가 좁은 한인 사회에서는 어디서 불쑥 아는 사람이 나타날지 몰라 옆에 있는 이들과 적당히 평이한 대화를 한다. 그래서 가끔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 지역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곤 한다.




해외여행을 가면 가끔 그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어 불편을 겪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함께 여행하는 이들과 맘껏 한국어로 떠들어대도 마음이 편한 의사불통의 자유로운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서 가족들과 스위스에 간 일이 있다. 열심히 검색해서 알아낸 좋다는 곳을 구경 가려고 기차에 타서 한국어로 신나게 떠들며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었다. 그런데 세상에!  같은 기차 칸 어디선가 한국말로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위스에서 유명하다는 높은 산에 올라가는 케이블카 안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갖가지 언어들이 뒤 섞인 속에서 한 커플이 나누는 한국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날아간 스위스의 기차 안에서, 산 꼭대기에서 그리고 스위스 국기가 걸린 거리에서 수시로 한국말을 하는 이들을 만났다. 처음엔 눈인사를 하며 웃고 떠들던 한국말의 수위를 줄였지만 두 번째, 세 번째 한국인들을 만나게 되니 반갑기보다 불편해졌다. 나중에는 같은 공간에 한국인이 없는지 나도 모르게 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가르쳤던 한국어 반에 고등학생 아들을 둔 한국인 2세 아저씨 학생이 있다.  한국어가 매우 서투른 이 아저씨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한국어를 자기보다 잘하는 아내와 공공장소에서 미국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신나게 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했던 그의 솔직한 한국어 학습 동기가 진심임을 알고 나는 그 아저씨 학생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살던 때, 주위의 사람들이 의식되어 말을 조심했던 것처럼 이 아저씨 학생도 자신의 말을 다 알아듣는 미국에서 영어로 거리낌 없이 말하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의사 불통의 자유로움을 꿈꾸는 그의 심정이 충분히 가늠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조심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말을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괜히 먼저 염려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언어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모르는 채 지나가지만 문득 스치는 한국어는 귀에 쏙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들의 말에 신경이 쓰일 때가 있다. 그처럼 내가 하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의도치 않게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 미국에서 살면서 버벅대는 영어로 인해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돼서 불편할 때도 많지만,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 보니 내가 한국말로 마구 떠들어도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의사불통에서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다. 물론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이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모험심 덕분인지 한국 사람 없는 곳이 없어서 항상 맘껏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적당히 조심하면 적당히 자유로울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는 주위에 한국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아 실컷 한국어로 떠들다가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K-pop과 한국 드라마 등을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 의외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많아진 덕분에 내 한국말을 듣고 어디선가 나타난 외국인이 한국어로 말을 거는 것이다. 물론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이해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의외로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복병들이 있으므로 외국에서도 한국어 수위 조절은 필요하다.


아! 한국어 불통으로 누렸던 자유의 범위는 줄어들고 있으나 내 나라 말인 한국어의 유명세 덕분에 이제 한국어 소통의 시대는 오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한국인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간사한 족속이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할 때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면서, 아쉬울 것 없이 내 맘대로 떠들고 싶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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